본문 바로가기

ru_happy

어글리베티, 소외된 자들의 웃음

[어글리베티, 소외된 자들의 웃음]

*주의: 스포일러 있음.

‘못생겼지만 착하디 착한 사람의 성공기.’ 광고로 처음 ‘어글리베티’를 접했을 때의 인상은 바로 그것이었다. 흔하고 뻔한 이런 주제의 드라마가 이제 와서 무슨 가치가 있을까 생각하던 무렵 이 드라마는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고, 이어 SAG(Screen Actors Guild Awards 영화배우조합상) 최우수 여자 연기상과 에미상 여우주연상, 감독상까지 휩쓸어 버렸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힘을 내뿜게 했던 것인지 궁금해서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드라마의 시작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가난하고 못생겼지만 착한 여주인공이 우연한 기회로 얻은 좋은 직장, 잘 나가는 매력적인 사람들과의 강렬한 대비와 주인공을 힘들게 하는 차별들. 그런데 에피소드가 더 해갈수록 소외된 자는 주인공만이 아님이 드러나게 된다. 주요 인물들을 나열해 보면 대략 이와 같다.

지나치게 못생긴 여주인공, 불법체류자에 살인범인 아버지, 철없는 미혼모 언니, 동성애자 성향의 조카, 섹스 중독에 마약 중독까지 겪는 남자 주인공, 성전환한 그의 형(누나), 알코올 중독인 그의 어머니, 폭력 남편을 피해 도망친 직장 동료 등등. 이런 사람들이 주인공인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전체적으로 웃음과 애정어린 시선을 잃지 않는다. 미숙한 작품들과의 차이점은 이러한 따뜻함이 터무니없는 환상에 의존하는 동화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아픔들을 직접 마주서고 인내하고 이겨내며, 작은 행복을 나누어 감으로써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작품 전반에 걸쳐 악역으로 등장하던 세 인물들도 딸과의 갈등으로 아파하는 어머니, 어머니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하지 못하던 동성애자, 사랑에 아파하는 여인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어, 온갖 모략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마치 강풀의 만화를 보는 것 같은 따뜻함이 있다

철저히 자본 중심적이고, 사회적 차별이 가득한 미국에서 어떻게 이렇게 소외된 자들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드라마를 내세우고, 예쁘지도 않은 라틴계 여배우에게 많은 상들을 몰아 줄 수 있었을까. 단순히 라틴계 미국인들의 지위 향상 탓으로 돌리기엔 우리가 보고 생각할 점들이 많다. 싸잡아서 비판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겠지만, 지금도 TV를 켜면 많은 드라마에서 주위에서 보기도 힘든 대가족이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가정부를 부리며 연애만을 하고 있지는 않나?

어느 사회나 소외 받은 자들은 있고 사회의 구성원들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써 그들에게 손 내밀어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웃을 수 있는 권리가 있으니까. 그런데 왜 우리나라는 소수의 권력자들이 작은 촛불들을 쓰러뜨려가며 더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려고만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