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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하녀

   참 재밌게 봤습니다. 참고로 하녀는 원작도 보지 못했고 임상수 감독의 작품은 '바람난 가족'밖에 못봤지만 하녀는 굉장히 재밌었습니다. 인상적이기도 했고 감독이 직접 언급하기도 했던 '하녀근성'도 제대로 표현된 듯 하네요. 물론 그것이 '여성'에 국한된 채 표현된 것은 안타깝기 보다는 논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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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일반에 공개된 뒤, 가장 뜨거운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이 바로 오프닝과 엔딩이 아닐까 싶네요. 오프닝에서의 갑작스런 자살. 많은 사람들이 자살과 은이의 반응에 관심이 많을텐데요. 저는 조금 다른 것이 보이더군요. 자살을 준비하는 여성과 거리를 지나는 많은 사람들.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과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 대부분은 여성이라는 점이죠. 영화를 끝까지 보더라도 주요 인물 가운데 남성은 '훈' 한 명뿐입니다.

   여성들 사이에도 위계질서는 뚜렷합니다. 오프닝에서 나오는 다양한 여성들 사이에도 어느 정도 위계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부터 아무 생각없이 노는 사람들. 결국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여성 사이의 완벽한 위계질서를 신분을 통해 보여줍니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해라의 속옷을 뻔히 보이는 지시에 의해 빨아야 하는 은이에게서 그것은 완벽하게 나타나죠.

   이렇게 여성들 사이에 완벽한 위계질서가 있지만 그 꼭대기는 결국 유일한 남성 출연자인 '훈'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오랜 세월동안 그네들의 권리를 위해 노력하고 나름 그 안에서 자신들의 위계질서를 만들어 왔지만 그래봐야 남성에겐 한 수 아래인겁니다.

   워낙 재밌게 봤던 영화다 보니 집에서 다른 리뷰를 조금 찾아보기도 했는데요. 일부 리뷰에서는 은이가 '훈'과 관계를 가지는 이유가 돈과 권력때문이다, 신분 상승을 위한 것이다 하는 이야기들이 보이던데요.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뭐 논란이 조금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냥 써보죠.

   멀게는 된장녀, 최근엔 - 입에 담기가 좀 그런 단어들이긴 하지만 뭐 꽤 많이 쓰이는 단어들이니까 그냥 써보죠 - 별창녀, 보슬아치까지. 의미가 굉장히 강해졌지만 어떻게 보면 일상에 더 가까워진 면이 있죠. 된장녀가 스타일과 가까웠다면 이후에 것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 삶의 방식이나 다름 없는거니까요. 그냥 뭐 그렇게 사는겁니다. 된장녀에서 돈이 조건이었다면 이후에 것들은 삶, 그 자체가 된거죠.

   그런 의미에서 은이는 신분 상승이나 돈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녀는 전세를 준 아파트도 있고, 하녀가 되기 전에도 나름 열심히 살아왔었습니다. 일부 리뷰에서 보이는 된장녀, 보슬아치로 보기는 힘들다는거죠. 오히려, 좀 더 자유로워진 현대 여성의 모습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혼녀로서 섹스. 그냥 그것이 좋은 것이죠. 피아노 치는 '훈'을 보고 한 눈에 반하고, 그를 기다리며 옷을 벗고 기다리는 은이는 '훈'이 그냥 좋은 겁니다. 돈과 권력에 대한 기대감이나 노림수 따위는 그녀에게 없습니다. 그냥 그 상황을 즐기는거죠. 그래서 이 영화가 좋았습니다. 현재 별창, 보슬아치 등으로 굉장히 왜곡된 채 표현될 수 있었던 하녀의 은이가 현대 여성으로서 굉장히 리얼하게 표현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이가 아이를 지우면서 변해 가는 과정은 좀 아까웠습니다. 완전히 상반된 캐릭터 연기는 정말 인상적이었지만, 그렇게 변해가는 은이가 안타까운거죠. 오히려 더욱 리얼하게 쿨하게 애를 지우고 돈을 챙기고 신나게 살면서 하녀일을 계속하면서 '훈'과의 섹스 라이프도 계속했더라면 좋았을텐데요. 그런데 글을 쓰면서 문득 드는 생각은 그녀가 왜곡된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변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녀는 돈이나 권력을 바란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삶을 즐겼고, 나미도 좋아했기 때문에 아이를 지우는 것이 싫었겠죠. 하지만, 권력에 의해 강제로 아이를 잃게되자 극단적으로 변한 겁니다. 이 쪽이 맞는 것 같네요. 은이는 왜곡된 여성이 아니라 그냥 현대의 리얼한 여성이니까요.

   이제 마지막 장면입니다. 딸의 생일에 터뜨리는 샴페인. 말도 안되는 선물. 하녀는 신분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옷을 제복으로 국한 시켜 신분을 정지시키고 상위 신분은 와인으로 대표되는 음식과 요가 등의 생활 방식으로 차이를 줍니다. 그 이미지의 끝이 마지막 장면에 함축돼 있습니다. 신분의 차이를 점점 극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벌어지는 여러 행태들은 점점 그로테스크해지는 거죠. 하지만 문제는 나미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점입니다. 나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여성으로서 '훈'의 모습을 가지게 될까요? 아니면 마지막에 왼쪽을 흘겨보니까 좌빨이 되는 걸까요?

   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나미는 왜곡된 삶 속에서 새로운 여성의 모습을 보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드네요.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요. 뭐 개인적으로는 그런 생활과 경험을 하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두 알고 있는 어린 여자 아이가 자라면 어떤 사람이 될지 정말 궁금하네요.

   원작도 못봤기 때문에 그냥 신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신분 상승을 노리는 여자의 복수극 정도를 생각했는데요. 오히려 차분한 현대 여성이 리얼하게 표현돼 너무 좋았습니다. 점점 취향은 변해가는 것 같네요. 자극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영상, 뭔가 남들과는 다른 것보다는 오히려 현실을 리얼하게 그리면서 세련된 표현법을 쓰는 게 좋네요. 그것이 현실의 내가 지금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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