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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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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자크 루이 다비드(1786), <소크라테스의 죽음>,  마르셸 뒤샹(1917), <샘>


   이전 글에서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언급을 한 바 있다. 오브제 트루베(objet troube, 발견된 사물)는 예술을 일상의 '발견'으로 보는 관점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뒤샹의 '샘'이 있다. 공장에서 다량으로 찍어낸 변기들 중 작가에 의해 우연하게 선택된 변기가 작품의 소재인 동시에 작품 자체가 되어 파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뒤샹의 작품은 예술과 철학의 경계에 대한 논란으로까지 이어진다. 예술은 무엇인가. 또 과연 정말 예술은 삶을 구원해줄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일상의 흔한 '해프닝'들을 '사건화'하여 사람들과 수다 떨고 다닌 덕에 이단 종교를 설파한다는 오해를 사서 독약을 마셔야 했다. 그가 독약 앞에서도 태연하게 마지막 교훈을 남긴 것은 철학세계의 자존심인양 자크 루이 다비드 외에도 많은 예술가들의 붓을 거쳐 꼿꼿하게 전해 내려왔다. (그림: 사면 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설득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내게 죽음을 달라고 명령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다. 신고전주의 기법으로 소크라테스만이 밝게 조명을 받아 마치 연극 무대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는 일상의 철학을 설파했던 소크라테스의 시대를 거쳐, 예술 혹은 철학 자체가 일상인 현대를 살고 있다. objet troube(발견된 사물)는 평범한 테이블이 예술작품인지, 평범한 가구인가 하는 예술의 구조적 의문을 제기했다고 볼 수 있다. 시각적 측면에서 예술이 일상에 더욱 가까워졌지만, 인지적 측면에서 예술은 시각적측면의 변화만큼이나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즉 예술작품의 수용자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더 이상 단순 수용자가 아닌 또 하나의 창작자(예술가)가 된 것이다.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은 공장에서 다량생산된 변기들 중 우연하게 선택된 변기 하나가 작품의 소재인 동시에, 작품 자체가 되어 파장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변기 하나에 다다이즘(dadaism, 무의미함의 의미를 암시함)이니, 레디메이드 작품이니, 오브제 트루베(objet troube)니 말이 참 많았다. 남자 변기가 '샘'과 무슨 철학적 개연성을 가졌는지는 도통 의문스럽기만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신 것이 헛짓은 아니었나보다. 적어도 철학은 변기(일상)에서도 발견되었으니 말이다.
 
   마우리치오 카델란(Maurizio Cattelan)의 Wrong Gallery는 예술과 철학의 경계가 허물어짐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보여진다. 마우리치오 카델란은 1991년 데뷔한 아티스트로서 뉴욕에서의 첫 개인전에서 살아있는 당나귀 한 마리를 설치하였다. 이후 동물애호협회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고 곧 문을 닫아야 했다. 이 전시에서 그는 샹들리에가 설치한 우아한 천장에 매달려있는 당나귀 모습이 자화상 같이 사치스럽고 화려한 환경 속에 던져진 자신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어떤 지방 갤러리의 작품 전체를 훔쳐서 ‘Another Fucking Ready-made'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열어 체포되었고,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는 그의 전시공간을 광고 에이전트에 팔아 어느 향수 제품의 선전장소로 쓰이게 했다. 뿐만 아니라 얼마전 밀라노에서는 너무나 진짜같아보이는 세 어린이들의 목을 나무에 매달아 놓은 ’Hanging Kids‘라는 작품으로 시민들을 경악하게 했는데 한 시민이 그 아이들(?)을 구출했고, 당국은 그 작품이 정말 예술작품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느라 정신을 쏙 뺐다고 한다. 더 재밌는 것은 그 이후 그가 예전에 500만원에 팔았던 ‘천장에 매달린 박제된 말 작품’이 뉴욕 경매장에서 20억원 이상의 가격으로 되팔렸다는 것이다.

이런 그가 자신의 몸값 올리기에 그쳤느냐 하면 절대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할당된 전시비용으로 기금을 만들어 다른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단체나 개인에게 상을 수여하는 등 이벤트를 만들어 social entertainer로서 사회적 금기를 깨곤 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우아하고 격있는 고급 갤러리들의 작품들을 풍자했고, 그러면서도 그 자신은 Wrong Gallery라는 비영리 예술공간을 만들어 동료 예술가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의 비영리예술공간(Wrong Gallery)은 그의 예술작품이자 그의 예술철학인 것이다. 그는 언젠가 social entertainer(사회적 엔터네이너)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 생각에 예술이란 항상 베푸는 관대한 것이지요. 제 작업은 상황들이 끝없이 바뀌고 다른 식으로 보일 수 있으며 행복도 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가 결과적으로 보는 것은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것이지요. 위에서 언급된 프로젝트들은 부의 분배에 관한 것이고 그것을 다시 재분배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들의 기본이 되는 생각이었어요. 빵집에 가서 빵 한 덩어리를 사는 것만큼 간단한 것이지요. 이러한 기본적인 ‘교환’에는 온갖 종류의 복잡함이 등장합니다. 관례적인 작은 모욕들을 일상 생활에서 참아내야 하고 상대방으로부터 뭔가 받아내려면 예의바른 미소를 지어야 하고 상대가 친절한지 공격적인지에 따라 목소리 톤을 바꾸고… 누구는 특권을 누리고 누구는 특권을 누리는 자에게 당하기도 하고….” 

   예술은 과연 무엇인가? 예술가는 무엇을 위해서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자인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은 무엇인가? 영국의 사이드(1993)이라는 학자는 그의 저서 『권력과 지성인』에서 전문화가 오히려 지성인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보고 아마추어리즘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노선과 장벽들을 가로질러 연결시키고, 전문성에 구속되는 것을 거부하고, 전문직업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사상과 가치에 관심을 두는 것을 통해 이윤이나 보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더 큰 심상으로부터 사랑과 억누를 수 없는 관심에 의해 움직이려는 욕망에 의해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한 사회의 사려 깊은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나라와 그 권력, 그리고 다른 사회에 대한 것만큼의 그 나라 시민들과의 상호작용 양식까지를 포함하는 가장 기술적이고 전문화된 행동의 핵심에 대한 것까지도 도덕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작은 기여’라는 말을 좋아한다.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모이면 커지고, 포기하지 않는 꿋꿋한 기여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아마추어리즘은 현대의 예술가들을 포함한 일상인들에게 주는 작은 격려가 아닐까. 예술은 정말 삶을 구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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