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bon

주객전도 계몽소설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0. 9. 23:51

Billy Joel 의 앨범자켓그림. 글과 관련없지만,,,이뻐서.



심훈(1935), 상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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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은후, 가끔 내가 과연 이 소재로 책을 쓴다면, 혹은 내가 주인공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한다. 내가 읽은 책들이 주로 옛 시대적 배경이기에 아마도 가끔은 터무니없기도한 상상을 하기에 더 편리했을 듯싶다. 이것이 문학의 거울보기효과 아니겠는가. 각설하고..

오늘 나는 학생들과 수업은 제쳐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필연적으로(한글수업이다보니,,) 심훈의 상록수를 떠올렸다. 나는 상록수작품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현대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감과 모티브를 주기에 충분한 작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상록수가 건전한 계몽소설이라서? 결코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심훈의 상록수는 계몽소설의 범주라고 배우긴 하였지만 요즘 다시 생각해보니, 이 책은 계몽소설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연애소설이거나, 영화 몽상가의 주인공들처럼 이상을 쫓는 젊은이들의 치기어린 낭만을 그린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교과서에 나온 아주 짧막한 에피소드는 분명 계몽소설의 기능을 갖추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계몽은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는 것이다. ‘상록수에서의 계몽은 말과 글을 통해 사람들의 정치적, 사회적 의식을 일깨우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상록수에서 주력하고 있는 스토리전개의 실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 책의 주요 스토리는 최용신의 애끓는 장거리연애, 병이 걸려 수술을 받으면 살 수 있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하게 계속 무리를 해가며 일을 하는 최용신의 남다른 희생정신에 초점을 맞추며, 박동혁과 최용신이라는 인물들의 영웅적 행적을 부각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심훈은 자신이 좌파 민족주의자임을 강조하고자 했다지만 작품속 박동혁이라는 인물의 연설에서 농민들의 문해교육이 사상운동이 아니라 계몽운동임을 강조하는 부분을 보며 그가 소극적이고, 어쩔 수 없는 우파 지식층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에서 언급했듯 계몽운동이 사람들의 정치적 사회적 의식을 깨우치는 것이라면, 사상운동은 도대체 뭘까. 말과 글은 원하든, 원치 않든 사상을 껴안고 갈 수 밖에 없으므로 굳이 그것을 나눌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보기 좋은 포장을 뜯어버리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그들의 계몽시킴으로써 그들을 사회와 독립운동의 현장으로 끌어와 인력동원이라도 했어야 했다. 사상서든 계몽서든 뭐 어떤가.


또 하나, 작품 속 몽매한 농민들은 박동혁과 최용신의 지도아래 글을 열심히 배우고,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조직을 결성하는 노력 등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박동혁과 최용신이라는 당시 특권계층(대학생)들에 의한 수동적인 자세를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내 사회적, 자발적 자아의 면모를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결국 이 소설은 대학생들의 목숨을 내건 낭만적 발구르기에 그치고 만다.

당시 1930년대 우리나라 문맹률은 85%에 육박했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 문해율은 많이 향상되었지만 지금도 글을 읽고 쓸줄 모르는 사람들이 전 국민의 20%을 육박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의 의무화된 지원으로 각 지방청들의 노력과 지원은 많이 향상되었으나, 가끔 재미있는 일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가령, ‘무료한글학교를 지원한답시고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로 전단지를 뿌리고, 홈페이지에 광고를 내는 모습들을 보면 말이다. 이쯤되면 각 시청 교육과마다 늘 오는 사람들만 온다라고 하는 볼맨 소리는 조금 우습기까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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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상으로 외치기는 교육에서의 주체자는 학생라면서 옛 작품 속에서도, 현재 우리 삶속에서도 이 주객전도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주와 객을 바꾸어 상록수의 주인공이 최용신이 아니라 작은 산골마을의 12살 먹은 아이라면, 혹은 40대의 주부라면 어땠을까. 최용신의 무모해보이기까지한 열정을 그들의 삶에 대입시켰다면 소설의 볼륨은 더 커졌으리라. 그랬다면 최용신과 박동혁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나 영화 몽상가에서처럼 아기자기하고 낭만적인 혁명가적인 면모는 정녕 볼 수 없었겠지만, 진정 이 작품이 계몽소설이라면 농민들을 계몽시키려다 애꿎게 죽은 처절한 여주인공이 아닌, 그 노력을 통해 세상을 향해 눈을 뜨게 되는 그 누군가가 주인공이었어야 했던 것 아닐까
.

필연적인 상상이라고는 했지만, 수업 끝에 우리는 한글을 다 배우고나면 시청으로 다같이 달려가서 무료강좌를 배우고, 자격증을 따자고 결의(?)하였다. 비록 그들이 60대의 노령이지만 앞으로 그들이 살아갈 날이 적어도 지금껏 살아온 날의 반이나 남았음을 다시금 상기하고 새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