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bon

quietly, with dignity, the queen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7. 31. 18:02


기대를 가지고 본 영화였다. 실망스러웠다고 단정짓기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지만, 나로선 'so what?' 스러웠다. 애초 내가 궁금하고, 이 영화에 대해 기대했던 것은 감독의 '관점'이었다. 도대체 감독의 관점은 어디로 간 것인가.

이미 영국내에서는 티비를 틀면 여왕의 지지율이라든가, 왕실에 대한 지지율, 여왕의 사치에 대해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 왕실의 전통과 위엄, 혹은 그것의 존폐에 대한 언급은 더이상 새롭지도 않으며, 토니 블레어의 민심 되살리기에 대한 열띤 노력 역시 영국의 이라크 파병 이후 거의 힘들다고 보여진다. 심지어 영국 왕자도 이라크 전쟁에 나간다고 하지 않는가.

이 영화에서 내가 실망한 것은 대중예술가로서 감독의 태도였다. 별 비판없이 이 영화를 보자면, 영화는 여왕의 대중을 뒤로한 진정한 리더로서의 고뇌와 총리의 정의와 왕실에의 존경을 말하고 있다. 또한 여왕의 사슴의 발견과 사슴의 죽음은 다분히 문학적이기도 하다.

대중예술은 문화이기 이전에 예술이다. 대중예술이 소위 예술인가 예술이 아닌가는 더이상 논쟁거리가 아니라고 본다. 다수가 소수의 위대한 담론에 참여할 수 없었던 오랜 현실을 극복한 대중예술에 얹혀진 짐은 '관점에 대한 책임감'이다. 대중예술이 현대인의 권태와 우울을 경감시켜주는 준다는 것만으로 대중예술의 도피적 성격에 대한 비판을 무마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예술이 예술이라 칭할수 있음은 창조자의 타협이 없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런식의 관점없는 밋밋한 접근을 할 의도였다면 차라리 다큐멘터리를 찍었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첫째, 감독이 여왕의 위엄과 고뇌를 보이고자 했다면 다이애나비란 소재는 다시 생각해봐야할 문제이다. 차라리 이는 이미 죽어 없는 여왕들이 만들어낸 역사들을 다른 시각을 통해 봤더라도 충분했을 것이다. 현존 인물에 대한 역사적 판단은 다소 섣부르며 위험하다.
다이애나비라는 소재 자체로도 큰 사건이 아니던가. 다이애나비의 생전모습들이 영화에 비칠때마다 나는 좀 뿔난 망아지같은 생각을 했다. "다이애나비 죽은 뒤 영국왕가의 추악한 모습에 대한 책을 내겠다던 작가가 있다더니 이런식으로 타협점을 본건가" 하는 터무니없는 비약을 틈틈히 했더랬다.

둘째, 감독은 진보주의자인가, 보수주의자인가, 아니면 소위 제 3의 길을 걷는가. 아니면 정말로 이런 것들에 관심도 없으면서 베짱좋게 여왕과 총리를 소재로 영화를 만든 것인가. 세 가지 중 어떤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특히나 영국민들에게 아주 민감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셋째, 모호하다.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화의 의도 역시 모호했다. 이 영화가 왕실에 대한 지지를 위한 영화라 하기에는 '사슴의 죽음(여왕이 목격한 사슴의 죽음은 곧 왕가의 몰락을 상징한다)' 으로 인해 모호해졌으며, 완전한 픽션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사실적이라는 데에 그 모호함이 있다. 더군다나 이러한 모호함이 감독의 의도적인 장치라 보기에는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에 대한 명확함이 떨어진다.


대중예술에서조차 '나는 고발한다'를 외칠 제 2의 에밀 졸라는 없는것일까.
영화는 내내 다분히 침묵적이었으며, 위엄있었을 뿐이었다.


처칠은 '20대에 진보적이지 않으면 심장이 없는 사람이고, 40대에 보수적이지 않으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라고 했다.
사람은 변한다. 상황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점은 우리를 지켜주며, 사물과의 끊임없는 connection을 창출한다. 예술이 그 고고한 전통으로부터 대중예술에 자리 한켠 내어준 것은 관점에 대한 책임감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감히 짐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