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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악마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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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를 보았다. 복수극. 제한상영 등급. 제목과 콘셉트와 기사를 보면서 이쯤하면 피칠갑은 기본이겠죠. 제목과 콘셉트만 보죠. 눈치가 조금 빠른 사람이라면 대충 이정도까지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역시 그랬구요. 뭐 이런거죠. 사이코 패스인 미친 놈이 여자를 잔인하게 죽인다. 여자의 남자친구는 뭐 잘나가는 놈인데 여자가 죽어서 눈이 뒤집힌다. 미친 놈의 주변 인물까지 집요하게 뒤쫓으면서 처절한 복수를 한다. 처절하게 복수하면서 그 미친 놈을 다시 만나게 되는데 만나보니까 어느새 나도 그 미친놈처럼 되어 있더라. 여럿 죽이고 잔인하게 복수하고 인간성을 잃어가고. 결국 누가 나쁜 놈이냐? 결론은 관객 너네가 한 번 생각해봐. 이런 식의 진행 말이죠.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뭐 복수극이라면 뻔한 거니까요. 하지만 김지운, 최민식, 이병헌이니까 보는거죠. 저는 잔인한 영화를 극도로 싫어합니다. 올드보이에서 나왔던 대사인거 같은데. 정확하진 않아요. 인간이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란 말. 며칠 전에 5살 난 여자아이가 무빙워크에 손이 빨려들어가면서 왼손가락 4개가 완전히 으스러진 사고가 있었습니다. CCTV를 봤습니다. 제대로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실제 현장의 핏자국을 봤고 목격자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아무리 누르려고 해도 머리 속에서 자동 재생. 그래서 전 잔인한 영화를 싫어합니다. 상상력이 좋은가 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막상 보니 생각보다 나름 참을 만 했습니다. 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넌 다른 사람들과 잔인함에 대한 기준이 다르니까 그렇지라고 하겠지만 저와 함께 영화를 봤던 관객들도 영화를 보면서 낄낄댔던 걸 생각하면 나름 참을 만한 수준인 건 확실합니다.  이유는 두 가지 정도. 먼저 방식의 문제. 뭐 뻔합니다. 잔인함의 방식. 스너프 필름이란 이야기도 있던데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기 위해 시체가 아니라 영화가 난도질을 당해서 그런지 몸서리쳐질 정도로 잔인한 표현은 있다면 있겠지만 저는 잘 모르겠더군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이유입니다. 자극에 대한 면역. 참 여러 방식으로 잔인함에 대한 면역이 사람들에게 생기고 있습니다. 먼저 영화를 보면서 잔인함에 대한 면역이 생기죠. 장경철은 사람을 때려죽이고 김수현도 잔인하게 복수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사람들은 이번에는 어떻게 죽일까? 어떻게 고통을 줄까?를 기대하게 되고 이제는 잔임함을 즐기게 됩니다. 낄낄거릴 수 있게 되는거죠. 이런 사람들의 인상을 잔인함으로 찌푸리게 하려면 더 강한 자극과 잔인함이 필요한데 그 정도 수준의 잔인함은 스너프 필름이 아니면 안 되겠죠.

   뉴스를 볼까요? 뉴스는 직업상 거의 매일 보려고 하는데 별에 별일이 다 생깁니다. 나영이는 이제서야 배변 주머니를 뗐고 버스가 폭발해 발목이 날아가고 어린아이의 손가락이 으스러지고. 이건 영화가 아닙니다. 내 아이, 내 가족, 내 이웃의 문제에요. 이런 잔혹함과 공포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어요. 그런데 고작 영화에 피칠갑 좀 한다고 겁내겠습니까?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불편합니다. 이유는? '왜'라는 질문을 한 번 해 봅시다. 나영이는 왜, 발목은 왜, 아이의 손은 왜! 공포 영화에는 공식이 있습니다. 죽을 짓을 한다는거죠. 화장실에 가거나 살짝 열린 문을 열어 본다거다 등등. 다시 '왜'라는 질문을 해보죠. 수현의 약혼녀는 왜? 간호사는 왜? 여고생은 왜? 그들이 화장실에 갔나요? 문을 열었나요? - 수현의 처제는 열었군요. - 그들은 절대 죽을 짓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수현은 차문을 끝까지 올렸고 간호사는 자신의 할 일을 다 했고 여고생은 피곤해서 잠시 잠든 것뿐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피해자가 되죠. 나영이나 발목이 잘린 여성이나 손이 으스러진 아이처럼 말이죠.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공포. 난 일상을 살고 있지만 그 일상에 느닷없이 끼어드는 위험요소. 그것이 영화를 불편하게 합니다. 영화 속의 피해자는 곧 현실 그대로를 반영하고 있고 현실에서의 피해자는 언제든 관객인 '나'가 될 수 있는거니까요.

   영화를 보고 집으로 오는 길에 조현오 청장의 격식 있는 슬픔 발언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동물처럼 울부짖는 천암함 피해자 유가족들. 청장님 영화를 보세요.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그 정도인게 정상이죠. 그들은 영화 속의 김수현처럼, 장경철같은 예상치도 못했던 위험요소에 가족을 잃었습니다. 김수현처럼 짐승이 되어 짐승을 잡으러 가지 않는 게 다행아닌가요? 그들은 짐승이 되는 대신 절규로 슬픔을 이겨내는 겁니다. 그걸 동물에다 격식이 없다고 표현하는 건 좀 아니네요.

   짐승이 된 김수현을 봅시다.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죠. 이 영화는 뻔한 복수극이니까요. 처절한 복수극의 막바지. 누가 승자냐 하는 뻔한 공방에 이은 김수현의 복수. 누가 승자고 누가 나쁜 놈이냐? 관객 너네가 한 번 생각해봐 하는 질문. 뻔한 것이긴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감독의 역량에 달린 겁니다. 하녀에서 계급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점점 그로테스크한 아이템과 영상으로 관객에게 이질감과 참신함을 보여줬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뻔한 이야기를 얼마나 신선하게 표현해 뻔한 이야기를 새롭게 전달할 것인가가 문제인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마지막 장면이 너무 좋습니다. 소리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을 확인한 수현. 그는 과연 울까요? 웃을까요? 이병헌이 그런 표정을 가지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리고 감독이 그렇게 수현의 모습을 표현할 줄 몰랐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반전이라면 반전이랄까요.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모든 피해자들의 가족은 평생을 그런 표정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지울 수 없는 슬픔과 삶을 살면서 겪는 기쁨. 이 둘은 함께 하는 것이 너무 어려우니까요. 전 아직 그 정도의 슬픔을 경험해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저도 언젠가는 그런 표정을 짓게 되겠죠. 세상은 그런 곳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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