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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미니츠, 속죄와 해방의 시간

[포미니츠, 속죄와 해방의 시간]

* 주의: 스포일러 많음


포미니츠(Four Minutes, Vier Minuten, 2006)는 독일의 음악 영화이다. 국내에는 과거 메가박스 유럽영화제 등에서 선보여졌다가, 최근 씨너스 이수에서 ‘말할 수 없는 비밀’, ‘원스’, ‘비투스’와 함께 ‘9월의 음악영화 특선’으로서 재상영되고 있다. 포미니츠의 국내판 포스터는 ‘4분’을 ‘자유가 허락된 시간’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지만, 이는 단순히 손에 채워진 수갑이나, 감옥 안에 갇힌 신세 같은 물리적인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시간은 그녀가 가진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이자, 그녀 자신의 인생을 함축하여 드러내는 시간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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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여성 구치소에서 시작된다. 죄수들과 간수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오던 크뤼거(트라우드 크뤼거)는 살인죄로 수감된 제니(한나 헤르츠스프룽)의 뛰어난 재능을 알아챈다. 사실 그녀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각종 대회를 휩쓸어 온 신동이었던 것이다. 크뤼거는 제니와 시종일관 부딪히면서도 그녀를 콘테스트 준비로 이끌고, 그녀와 정신적인 교감을 하게 된다. 이런 줄거리만 가지고 보면, 신동과 스승의 이야기라는 일반적인 휴먼드라마의 구조를 따를 것만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 정도면 관객들이 울어주겠지?’와 같은 공식적인 감정선을 미묘하게 벗어난다. 애써 슬픈 과거를 고백한 크뤼거를 앞에 두고, “그래서요? 지금 이 대목에서 울어야 돼요?”라고 한다거나, 그녀에게 마음을 열려는 스승에게 주먹을 날리는 제니의 행동들이 그렇다. 물론 그녀의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겠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 억눌려진 응어리를 생각하면 왠지 그쪽이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어긋남’이 좋게 보였던 이유는 또 있다. 만약 이 이야기가 무난하게 풀려 버렸다면, ‘과연 그렇다면, 재능이 있는 사람은 감옥에서도 자유와 용서를 얻을 수 있나?’와 같은 또 다른 도덕의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특히 위험할 수도 있게 느껴졌던 이유는 바로 이 영화가 ‘독일’영화이기 때문이다. 특히 크뤼거는 과거 2차대전 중에 나치 밑에서 간호사 활동을 했던 과거가 있고, 미군에 의해 폭격되는 수용소의 장면들까지 보여지니, 이러한 이야기는 “독일도 사실 피해자일 수 있으며, 설사 죄를 지었더라도 ‘재능있는’ 독일인들이니 용서해주자.”라는 선동적인 언어로 변질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올바르게 보여졌던 것은, 그러한 ‘재능’에 의한 해방이 아니라 ‘속죄’에 의한 해방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 점은 제니와 간수 뮈체와의 관계로 다시 살펴 볼 수 있을 것 같다. 제니는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하는 뮈체를 폭행하고, 뮈체는 이런 제니를 괴롭히는 관계가 계속된다. 제니는 크뤼거에게 교육을 받으면서 뮈체에게 사과를 하게 되지만, 그는 이 사과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해자가 단순히 사과를 한다고 해서 속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과에 진심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피해자가 진정으로 용서를 해서 갈등이 해소되어야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겉으로만 2차대전 피해자들에게 사과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행동을 보이는 일본 정부의 태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뮈체와 제니의 관계는 진정으로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뮈체는 제니의 손을 망가뜨리려는 음모에까지 동참하게 된다. 나중에서야 서로는 진심으로 미안한 맘을 가지게 되고, 뮈체는 제니의 탈옥을 도움으로써 그녀에게 용서를 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자연히 타지에서 만났던 독일 친구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세계여행을 다니던 세 명의 독일 여인들은 “우리는 맥주의 나라 독일에서 왔어, 그러니 여기에서 제일 좋은 맥주를 내놔!”라고 소리치던 호탕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술에 꽤 취한 한 친구의 취중진담은 상당히 의외였었다. 자기는 독일인이라는 것이 너무나 부끄럽고 슬프다는 얘기였고, 그 이유는 바로 독일인이 나치를 도와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과거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독일에서는 나치와 전쟁의 잘못에 대해 철저히 교육한다는 말을 본 적은 있었지만, ‘설마, 그래 봤자지.’라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를 보고 나니, 과거의 잘못을 뇌리에 박힌 죄의식이 될 정도로 가르치는 독일 교육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독일 사회가 분명 사회적으로 올바름에 대한 인식이 바로 잡혀 있다는 의미로도 여겨졌다.

이 영화도 그와 같은 올바름에 대한 인식, 혹은 잘못에 대한 죄의식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제니의 마음은 방탕한 생활로 인해 살려내지 못했던 아들에 대한 죄의식과 그에 따른 자신과 사회에 대한 분노였을 것이고, 크뤼거의 행동은 자기 목숨을 위해 나치에 동조하고 자신이 사랑하던 연인이자 제자였던 사람을 외면했던 자신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제니만은 바른 길로 이끌어 구원해주고 싶다는 것으로 이어진 것이리라.

최후의 4분에 이르면, 제니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신들린 공연을 선보인다. 마치 자신의 잘못을 속죄라도 하듯이. 이 연주는 클래식과 흑인음악 사이의 갈등, 제니와 제니 아버지의 갈등 (그는 제니의 입장을 도와주고 쓸쓸히 떠나는 것을 택한다), 크뤼거의 금욕(금주/사랑)과 욕망 간의 갈등, 제니의 방탕하던 생활과 크뤼거가 가르치는 바른 예절 간의 갈등, 음악과 현실의 고통 사이의 갈등을 모두 감싸 안고 카타르시스로 나아간다. 이 짜릿한 감동이 제니의 감옥행을 막지는 못하겠지만, 우리는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많은 변화를 불러 올 것임은 예상할 수 있다. 그녀의 마지막 무대인사가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최후의 연주를 하러 가기 전, 크뤼거는 제니에게 말한다. 자신은 백발이 되기까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찾지 못했지만, 너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냐고. 나에게는 그 답이 과연 무엇일까, 내게 4분이 주어진다면 과연 무엇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해본다.



......

PS 1. 제니 역의 한나 헤르츠스프룽은 놀라운 연주 솜씨를 보여주어서 피아노 전공자를 섭외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모델 출신으로 이 영화를 위해 6개월 여의 특훈을 받았다고 한다.

2. 크뤼거는 실존인물을 배경으로 만들어 낸 캐릭터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