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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와 고양이

김민의 도전(?)에 힘입어 소설 하나 올려 봅니다.

고양이를 부탁해와 관련하여 썼던 습작입니다.
먼저 올린 블로그글과 출발점(동일한 메모)이 같네요.
(참고삼아 서로 트랙백 걸어 둡니다.)


[장마와 고양이]

창 밖에선 보름째 비가 계속 되고 있었다. ‘오늘도 ‘장마’가 있겠지.’라는 생각에 일부러 창문을 열었지만 오늘은 장마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날씨에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다른 안식처를 찾은 것인지 궁금해진다. ‘참 밖에 돌아다니기 힘든 날씨로군.’이라고 생각은 들지만, 사실 난 밖을 돌아 다닐 일이 거의 없다. 법전과 문제집만을 보고 또 보는 생활, 고시원 앞 학원으로 건너갈 때와 라면을 사기 위해 지친 몸을 끌고 나가는 경우를 빼곤 좀처럼 햇볕을 쬐는 경우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비가 오면, 슬리퍼를 신은 발로 길 바닥에 고인 물을 철퍽철퍽 밟으며 ‘나는 지금 바다에 와 있다. 나는 지금 해운대 해변에 서 있다.’라고 자기최면을 걸 수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비 오는 하루하루에 익숙해져만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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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를 내가 처음 본 것은 저 비가 처음으로 오던 날이었던 것 같다. 고시원 앞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 라면 몇 개인가를 사고 올라오던 길에 비는 갑자기 내리기 시작했고, 주변 사람들은 언덕을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왠지 언덕을 뛰어 오르기가 귀찮아져서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맞으며 터벅터벅 걸어 올라왔다. ‘바보.’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탓하면서 흠뻑 젖어버린 채로 창문조차 없는 좁은 방으로 돌아왔다. 요즘의 비는 산성비라 맞으면 머리가 다 빠진다는데, 나는 이미 외모가꾸기 따위는 포기한 처자인지라 그렇게 우물에서 갓 올라온 사다꼬 같은 차림새로 샤워실을 향했다. 그러다 샤워실 창문 밖 너머로 옆집 지붕 밑에 쪼그리고 앉아 비를 피하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내 몸매는 감추고 말고 할 것도 없는 막대기형인데다가 사람도 아닌 그저 고양이였지만, 괜히 내가 보여지는 게 민망해져서 창문을 닫으려고 다가갔다. 내가 고양이를 향해 ‘뭘 봐?’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니 고양이는 마치 올드보이의 대사인 양 ‘누구냐 넌?’이라는 듯한 눈빛을 내게 보낸다. 나도 ‘그러는 넌 누구냐!’라는 눈빛을 눈에 힘을 주어 쏘아 보내준다. 고양이는 당연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눈은 초롱초롱했지만 비를 맞아 우중충하게 쳐진 모습이 왠지 비 맞은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친근함과 안쓰러움이 함께 느껴졌다. ‘이름을 붙여주자.’라는 생각이 들어 요리조리 고민을 해보지만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질 않아 그냥 ‘장마’라는 이름을 그 혹은 그녀에게 붙여 주었다. 장마가 시작된 날 만났음을 기념하는 의미로. 이런 한심한 작명 센스라니…… 예전엔 나름 ‘감수성 No.2’라고 불렸는데 이 좁은 회색 건물에 갇혀 사는 동안, 감수성이 다 메말라 버린 것만 같다. 나의 새 친구‘장마’는 그렇게 내가 샤워실을 찾을 때마다 창 밖 너머에 자리하고 있었다.

‘장마’가 없음을 아쉬워하며 샤워를 마치고 나와, 다시 두꺼운 법전을 폈다. 깨끗한 마음으로 공부를 다시 시작해보려 하지만, 오늘도 역시 깨알 같은 수많은 글자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다. 내리고 내린 비가 다시 쌓이고 쌓여 이제는 고시원이 위치한 언덕보다도 높아 보였다. ‘똑똑’ “누구세요?” “나야, 문 좀 열어봐.” 옆방 미선이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 주었다. “서연아, 우리 요 앞에 피크닉가자.” “비 오는데 무슨 피크닉?” “아니야, 이제 막 그쳤어. 일기예보에도 오늘이 장마 끝나는 날이라고 그랬거든.” 미선이의 재촉에 추리닝에 슬리퍼 차림으로 고시원을 나섰다. 얼마 만에 올려다보는 하늘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여전히 하늘엔 잿빛 구름들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저 끝에는 햇빛이 조금씩 스며 나오는 듯도 했다.

언덕 아랫편에 있는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서, 우리들은 일명 고다방이라고 불리는 고시원 자판기 커피를 벗삼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미선아, 너 혹시 샤워실 밖에 있는 고양이 봤어?” “어, 너도 봤어?” “어, 비에 다 젖어 가지고 무섭게 생겼더라. 나 고양이 키우고 싶었는데, 그거 보니 마음이 확 달아나더라구. 난 그 있잖아.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이요원이 들고 있는 고양이, 그런 게 갖고 싶어.” “음. 어떤 고양이였더라……” 내 또래의 친구들 중에는 유독 고양이를 키우거나, 키우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 친구들 꼬임에 넘어가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영화도 같이 봤었지만, 열광하던 친구들과는 달리 나는 왠지 그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내 눈에는 주인공들이 스무 살답지 않게 너무 한심스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경계인이 아니라 경계를 넘지 못한 아이들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내 자신은 스무살은 커녕, 이미 이십대의 절반이 꺾여 버린 후에도 여전히 경계를 넘지 못하고 방황만 하고 있었다. 내가 그 영화를 싫어했던 건 어쩌면 나의 유치함이 너무 싫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야, 저거 봐봐, 저거 그 고양이 아니야?” 미선이가 가리키는 곳에는 ‘장마’가 있었다. 비에 젖은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서 많이 달라 보였지만, 저 날카로운 듯 초롱초롱한 눈빛은 분명 장마가 분명했다. 장마는 쪼그려 앉아만 있던 예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말쑥해진 모습으로 활발하게 뛰어 다니며 한 꼬마 아이를 향해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도둑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아마도 주인이 있었나 보다. ‘음. 이제는 장마를 보기 힘드려나?’ 장마도 끝이 나고, 장마와의 인연도 이제는 끝인지도 모르겠다. 구름을 뚫고 본격적으로 햇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나무도 아니건만, 햇볕을 쬐니 피부가 광합성을 하면서 몸의 기운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눈부신 햇빛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지금의 시기는 내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장마일지도 모른다고. 다시 또 장마는 오겠지만, 그때도 장마가 끝나는 날은 있을 것이라고. “미선아. 너 다이어트 같이 하자고 그랬지? 우리 기숙사까지 뛰어가기 하자. 지는 사람이 밥 사기. 자 시작!” 나는 황당해하는 미선의 표정을 뒤로하고 언덕을 힘차게 뛰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