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먼에 따르면, 언론은 국가와 개인의 활동을 지배하는 특정 이익집단에 대한 지지를 결집시키는 기능을 하며, 언론이 선택하고 강조하고 생략하는 바가 흔히 최선으로, 때로는 매우 명칭하고 통찰력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는 것이다. 권위 있는 언론이 마땅히 가져야 할 '게이트 키퍼'로써의 역할을 이용하여, 능동적으로 여론을 조작하며 권력에 협조하고 대중들에게는 미국, 나아가서는 세계를 이해할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언론은 특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며 그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충실한 개처럼 무차별적인 비판을 쏟아내고, 어떠한 사건이 그들의 이익과 연관된 경우에는 사실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침묵을 지키거나 그들을 정당화 시키는 역할까지 자행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언론은 현재 미국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서 저지르고 있는 살인과 전쟁 등의 만행들을 방관한데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선전 모델의 결론이다.
언론이 이 사회의 촘촘하게 연결된 권력 구조의 일부로써, 그 구조를 견고히 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선전 모델의 결론은 마치 칼 마르크스의 사회체제론을 처음 접했을 때의 기억처럼 허탈하기 짝이 없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는 모든 사회의 구조가 자본에 귀속될 수밖에 없다는 칼 마르크스의 이론처럼, 언론은 사회의 모든 관계에서 중립적인 역할을 하는 양 행세를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는 그들 역시 자본의 영향력 밖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권력을 가진 자들을 감시하고 비판하여야 할 언론이 그 권력자들 중 하나일 뿐 이며 넘지 말아야 할 적정한 선에서 사회의 통제와 통합을 책임지는 사회 엘리트들의 충직한 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하먼이 지적한 현재 언론의 모순은 오랜 언론의 역사 속에서 그들이 터득한 생존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올바른 언론의 역할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론으로써 살아남아야 하는 그들의 현실 사이에서 분명 수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살아남기를 택했고 현실의 모순과 타협했다. 비겁하기 짝이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들을 그저 비판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그들의 모순이 나의 모순과 많이 닮았기 때문일까.
**이텔릭체는 각주표시입니다. 각주를 어떻게 다는지 모르겠네요.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하먼, 여론조작, 정경옥 역,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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