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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판의 미로

- 이 글은 몇 달 전 개인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약간 손본 것입니다.


판의 미로는 잔혹한 판타지다, 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약간 망한 듯한 케이스입니다. 우리 나라 여자들은 무서운 건 참아도, 잔혹한 건 또 못 참지 않습니까. 판타지 영화가 잔혹하다니. 대가리를 쪼개고 입을 찢는 잔혹함과 판타지 영화라면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를 떠올리는 관객 사이의 괴리감이 이 영화를 마이너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영화 쯤으로 여기게 만든게 아닐까요.

어쨌든 이 영화를 누군가와 같이 보기는 포기했고(근처 사는 지인들 중에 영화를 같이 보러 갈 만한 여자들은 이런 영화를 안 볼 것이고, 남자들 중에서는 단둘이 영화를 같이 보러 갈 만한 사람이 없지요), 궁금하긴 하고 해서, 얼마 전 아는 형 결혼식에 포항으로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PMP를 이용해 감상한 영화입니다.

판의 미로라는 제목 역시도 이 영화가 관객에게 어필하는데 방해를 한 주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판의 미로라니, 판(plate) 위에 만들어진 미로? 판을 세워서 만든 미로? 정도로밖에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이딴 제목은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알고 보니 판은 내용 중에 등장하는 괴물 이름이더군요. 설정상 판은 선한 역할을 하는, 또는 선한 역할을 하는 척하는 악한 괴물인데, 생긴 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아무튼 이 영화가 약간 잔혹한 장면이 들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 내내 흐르는 스페인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긴장감, 그 사이에 묘하게 위치하고 있는 고위 군관의 재혼녀와 의붓딸(얘가 오필리아입니다), 그리고 히틀러에 대한 오마쥬로 보이는 문제의 악당 아저씨와, 절대악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포스로 인해 전달되어 버린 악당 아저씨의 집착과 집념, 영화 내내 쏟아져나오는 생소한 스페인어 대사들로 인해 기묘하고 독특하면서도 몰입감을 선사했던 꽤 좋은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상향이 사실은 구라일지도 모른다, 는 것은 모든 판타지가 늘 가지고 있는 위험요소이지만, 실제로 그것을 다루는 판타지는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작가가 설정한 세계관을 성공적으로 전달하기에 급급하니까요.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설득력있게 전달하면서도 현실 세계의 문제를 잘 반영하는 정도, 로 판타지에 대한 평가 척도는 충분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판의 미로는 판타지의 근원적인 위험요소, 상상이 단지 상상일 뿐인 상황의 절박함과 위험함을 드라마적으로 잘 드러내서 충격적일 정도로 신선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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