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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요. 부모님께서 책을 한 질 사줄테니 골라보라며 금성출판사 안내책자를 주시더군요. 거의 일주일을 SF전집과 추리소설전집 사이에서 고민하다 추리소설을 골랐습니다. 물론 어린 나에게 추리소설은 어려웠고 1년을 고스란히 책장에서 썩혔죠. 당시 중학생이던 사촌 형이 집에 놀러왔다가 1권이었던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에 포함된 황금벌레를 읽고 나에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의 시라토리처럼 Logical Monster 되고 싶어졌던건 그때가 시작이겠군요.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을 알게 된 건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 덕분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을 내내 같은 반에서 보냈고 같은 대학에 진학했죠. 고등학교 때는 추리소설 한 권으로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하는 건 일도 아니었죠. 물론 나쁜 짓도 많이 했습니다. 내가 먼저 읽은 추리소설을 그 놈이 읽고 있을 때 범인 이름 밑에 몰래 밑줄을 그어두기도 했으니까요. 그 친구가 어느 날 난데 없이 책 제목을 말하며 읽어봤냐고 물어봅니다. 제목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건 당연히 The Beast Batista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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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워낙 잘 아는 친구의 추천이었기에 내 입맛에 딱 맞을게 틀림없었지만 더욱 읽고 싶게 만들었던 그 녀석의 한 마디. '작품 속에 꼭 너 같은 놈이 하나 나온다.' 악역일건 뻔한 사실입니다. 저의 캐릭터는 그녀석에게 Teodore Bagwell이니까요. 책을 사나마나 하던 찰나에 아는 동생이 책을 추천해 달라네요. 주저없이 이 작품을 추천해 사게 한 다음 제가 그 동생 보다 먼저 책을 다 읽었네요. T-Bag같은 기민함. 허허.

의학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병원에서 발생하는 여러 일들에 익숙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저는 그레이 아나토미도 보지 않았고 하얀 거탑도 보지 못했기에 이 작품 속의 상황이 매우 신선했습니다. 주인공인 다구치 캐릭터도 무척 맘에 들었습니다. 탐정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분류되죠. 익히 알고 있는 천재적인 안락의자형 탐정과 임기응변과 움직임으로 승부하는 하드보일드 탐정이 그것입니다. 셜록 홈즈나 파일로 밴스, 오귀스트 뒤팽 등이 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죠. 필립 말로우나 샘 스페이드 등이 후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수사관인 다구치 의사의 경우 어떠한 부류라 구분하기가 힘듭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와 특유의 감각을 보면 전자에 속한다라 하겠지만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헤메는걸 보면 완벽하진 못합니다. 정보 수집이나 임기응변을 보면 후자인 것 같지만 나른한 성격이나 생활패턴, 상황 대처를 보면 그것도 아닙니다. 좋게 말하면 독특하고 신선한, 나쁘게 말하면 이도 저도 아닌 캐릭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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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구치가 힘들어 하는 타이밍에 바로 제 캐릭터! 시라토리가 등장합니다. 하하하. 물론 Logical Monster는 아닙니다만 말하는 방식은 무척 공감하게 되더군요.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말투. 하고 싶은 이야기만 직접적으로 뱉어내는 성격. 특히 상대방이 자신의 이야기를 빨리 이해를 못하거나 약점을 보일 경우 일말의 지체도 없이 공격하는 부분들이 비슷하기도 하지만 꼭 배우고 싶더군요.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다구치와 강한 캐릭터인 시라토리가 바티스타 수술팀이 이뤄가는 기적과 그 가운데 벌어지는 사건을 눈으로 확인하며 해결해갑니다. 바티스타 수술팀을 이루고 있는 캐릭터도 무척 인상적입니다. 팀장인 기류부터 간호사인 오토모까지. 각자가 가진 개성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색깔있는 캐릭터들이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서 살아 숨쉽니다. 다시 말하면 그냥 읽기에는 무척 재미있습니다. 추리소설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다라고 할만합니다. 새벽 4시에 1시간만 읽고 자야지라고 시작해 절반을 단숨에 읽어버렸으니까요. 다구치의 인터뷰, 시라토리의 논리, 의료계의 현실, 심리적 밀실 등 다양한 이야기를 잘 버무려 놓았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있죠. 추리소설이라 하기엔 약한 반전과 퍼즐로서의 가치입니다. 엘러리 퀸과 S.S 반다인의 매력 중 하나는 바로 독자와의 승부입니다. S.S 반다인의 경우 독자와의 승부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있지 않지만 특정 부분까지 읽으면 뒷부분은 해결편이구나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특정부분까지 읽은 후 내 생각을 정리하고 작가와의 승부를 펼칠 수가 있죠. 네가 날 속일 수 있을 거 같아? 마치 스릴러 반전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죠.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 그러한 요소가 거의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 이미 사건은 해결 되었고 범인의 의외성 따위는 전혀 없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어려운 용어들이죠. 패시브 페이즈, 액티브 페이즈, 의료 전문 용어 등이 쉴새 없이 쏟아집니다. 이야기 진행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복잡한건 사실입니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편의 영화로 만든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반 인터뷰 장면의 클로즈업 화면, 수술 화면, 시라토리 캐릭터 등 재밌는 영화의 요소가 가득 들어 있고 시나리오로 만들기에도 참 쉬울 것 같더군요. 반전만 제대로 만들어 준다면 정말 좋은 영화가 될 법도 합니다.

올해도 다가고 여전히 백수인지라 고민이 많네요. 그래도 오랜만에 재밌는 책 읽는 동안 잠시나마 고민을 잊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대중문화는 다 이런 식인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잠시 잊었다가 끝나니 압박감은 배로 밀려오네요. 작품 중에 시라토리의 설명과 다구치의 반응이 나옵니다. Offensive hearing의 반대말에 대한 부분이죠. 사람은 참 속기 쉬운 동물입니다. 제 정신으로 진짜 Logical Monster가 되고 싶은 하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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