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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 앤 더 시티

[도넛 앤 더 시티]

공중파 텔레비전을 통해 보던 ‘외화’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열렬히 찾아서 보는 ‘미드’로서의 경험은 ‘프렌즈’에 이어 ‘섹스 앤 더 시티’가 두 번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전에는 사실 우리나라 드라마도 괜찮은 작품들이 있는데 굳이 미드를 찾아서 볼 필요가 있을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에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영어를 즐겁게 공부하려는 목적에서 하나씩 찾아 보기 시작했더니 결국에는 열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 작품도 또렷한 나레이션 발음이 좋다는 친구의 추천 덕에 선택을 하게 되었다. 다만 역효과는 신체 부위나 특정 행위에 대한 어휘력만 갈수록 늘어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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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앤 더 시티’는 성과 사랑, 인생에 대한 적나라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도시 생활의 판타지이기도 하다. 매회마다 동일한 의상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할 만큼 다양한 패션, 수많은 볼 거리들과, 우리나라에도 전파시킨 브런치 문화 등은 이 작품을 문화 전도사 겸 PPL 최대의 성공작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마놀로 블라닉’ 구두를 신게 될 일은 절대 없는 이상, 나를 사로 잡아버린 상품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크리스피 크림’의 ‘글레이즈드’ 도넛.

‘크리스피 크림 (Krispy Kream)’은 몇몇 에피소드에서 간혹 손에 들려 등장하다가, 한 에피소드에서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산후 다이어트로 고민하던 미란다가 다이어트 모임에서 만난 뚱뚱한 남자와 데이트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 글레이즈드 하나를 칼로 잘라 먹으며 서로의 고민과 욕망에 대한 공감을 하게 되는 것. 글레이즈드(glazed 광택제를 바른)란 이름에 걸맞게 과도한 설탕(일반 설탕이 아니라고는 하지만…)으로 코팅된 이 도넛은 반짝반짝 흐르는 윤기가 정말로 과도한 식욕을 일으키지만, 한 개를 먹으면 지구 몇 바퀴를 돌아야 할 만큼 살찌게 하는 머시멜로우가 들어있다는 초코파이보다도 더 많은 바퀴 수의 운동을 요구할 것만 같다. 가게 이름 그대로, 바삭한(크리스피 crispy) 겉을 깨물면 부서지는 코팅 사이로 푹 꺼진다 싶을 정도로 말랑말랑한 크림(Cream) 같은 속살이 이 도넛의 매력이다. ‘던킨 도너츠’는 다양하게 골라서 하나씩 먹어보는 재미로 간다면, 크리스피 크림은 갓 나온 따끈한 글레이즈드 하나만을 위해서 가게 된다는 점이 큰 차이랄까?

지금은 체인점이 국내에도 많이 확산된 덕에 좀 더 쉽게 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때는 친구와 함께 취업 준비 공부를 하다 보니 집 근처에 마땅한 장소가 없어 크리스피 크림을 종종 회의실로 사용하곤 했었다. 면접예상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연구하던 중 “당신을 사물로 표현해 보시오.”라는 질문이 있었다. 친구가 만들었던 답을 하나 공개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그 친구는 이미 좋은 곳에서 일하고 있기에 허락 없이 몰래 올려 본다.) “저는 크리스피 크림입니다. 한 번 맛을 보면 중독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저는 ‘텔미’처럼 중독성이 강합니다.’라고 말하고 원더걸스의 텔미 춤을 추겠다는 방안도 있었지만 그것은 차마 성사되지 못했다.

길을 걷다가 크리스피크림의 간판을 보게 되면 드라마 ‘섹스앤더시티’의 장면들과 함께, 그곳에서 친구와 함께 미래를 고민하던 시간들이 떠 오른다. 하지만 가장 생각나는 사람은 반대로 크리스피크림에 같이 가 보지 못한 사람이다. 지나치게 달콤해서 내가 좋아했던 그 도넛과 그 카라멜 라떼가, 그 사람은 너무 달아서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서로 ‘때지(pig)’라고 놀리던 그 사람과 함께 드라마의 장면처럼 글레이즈드 하나를 나누어 먹어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지금도 문득 피어 오른다.


* 이미지는 온무비스타일 홈페이지의 갤러리에서 가져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