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nbon

이방인


글을 쓰는 것은 가슴 답답함이 아닌 궁금증과 그리움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부터 햇살이 너무나 뜨거워서일까, 까뮈의 『이방인 (1942)』이 자꾸만 맴돈다. 햇살이 너무나 강렬해 사람을 죽인 뫼르소가 이해할 수 없었던 ‘상식의 세계’가 나 역시 넌더리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늘 무엇에나 결국은 익숙해진다. 이 사회에서 살아나가고 있는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떤 일에서나 삶의 맥락을 찾으려 애쓰며, 연결고리를 만들어가고 싶어한다. 즉 일상의 부조리를 인식하지 못하며, 그렇기에 크게 행복하거나 크게 불행하지 않은 채, 근근히 일상을 살아내는지도 모른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더위와 졸리움을 느낄 뿐이며, 심지어 어머니의 나이조차 모른다. 어느 더운 여름, 햇빛이 너무 뜨거워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 자책이나 후회를 느끼는 대신 권태감을 느낀다.

뫼르소의 인생은 보르헤스의 소설에 나오는 어느 주인공의 인생만큼이나 허무하다. 죽을 병에 걸렸다가 회복된 후 오른 여행길에서 주인공은 어느 주막에서 우연히 그 앞에 떨어진 단도로 인해 뜻하지 않은 결투를 하게 되어 죽게 된다. 병에서 겨우 살아남았는데 말이다.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은 후, 지금 죽으나 20년 뒤에 죽으나 다를게 무엇인가 하고 혼자 되내인다. 마치 장뤽 고다르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 의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자신을 살인밀고 한 일을 안 후, 아무렇지 않게 ‘감옥가서 벽이나 볼테야’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가 정상일까? 이 대답 이전에 이 세상은 과연 정상인가?
샤르트르가 평했듯 아마도 그는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원시인’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 어떠한 위선과 악을 보지 못했다. 그는 그저 한 사람일 뿐이다. 
혹, 그를 바라본 나와 샤르트르가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원시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일 뿐이다. 자신의 존재를 누가 규명할 수 있을까. 실존적 인간은 어느 집단에도 속할 수가 없다질 않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bonb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피에르 쌍소  (4) 2007.09.04
Sons and Lovers - D.H Lawrence  (5) 2007.08.27
에릭 호퍼, 길위의 철학자  (0) 2007.07.31
소크라테스의 죽음  (1) 2007.07.31
나는 고발한다 -에밀 졸라  (1) 2007.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