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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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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열이 오를대로 올라서는 숨을 참을 줄도 몰랐고, 감정을 침잠시킬 방법도 몰랐을때, 늘 가슴 먹먹하던 시절 본 영화다. 아직도 이 영화를 생각하면 창백한 색감과 단조음의 피아노 음이 끊임없이 코속부터 머리까지 휘휘 돌고 돌아 감정-인플레이션이 되어버린다.

피아노는 에이다에게 하나의 '생명체'로서, 이미 그녀의 의식속에 존재하여 그녀의 사랑과 닮아있다. 표면적으로 단지 피아노의 잠식만으로 그녀는 함께 해방되었고, 창백하리만큼이나 자유로와졌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 인생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 산다는 구절이 있다. 사랑이 늘 낭만적인것만은 아니듯 릴케의 말 역시 상투적이라고 단정짓기엔 인생은 내가 생각하고 알아왔던 것보다는 복잡할지도 모른다.

에이다는 자신의 몸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기던 피아노 건반 하나를 떼어내 자신의 사랑을 전달한다.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것만큼이나 아프지만 피아노 건반은 그녀자신과 그녀가 소유한 사랑을 드러내는 매개체이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첫번째 도약이기도 하다. 베인즈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틀 밖으로 뛰쳐나온 에이다에게는 피아노의 굴레에서, 혹은 남편의 소유로부터 벗어남이 그녀의 잘린 손가락만큼이나 절실하다. 비록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되었지만 그녀는 자유롭다.

상처는 직관이 아닌 인식이기 때문에 그것은 누가 알아주든 아니든, 어딘가에 있는 외딴섬의 화석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상처받을까봐 전전긍긍하며 화석같은 삶을 산다.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상처받는 것이 무서워 에이다의 남편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자신이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르고 해치기도 한다. 그는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보지도 못하고 섣불리 자신의 소중한 것을 파괴하고, 미련없는척 잘난척도 해가며-사랑을 도려낸다. 그 칼로 도려내는게 자신의 살인줄도 모르고, 안쓰럽게.

상처가 좀 나면 어떠랴. 그러므로써 내가 존재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누군가 함께 있어준다면- 조금은 더 여유있게 다른 사람의 상처가 아물길 기다려주자. 그 사람을 바라보는건 폭탄만한 상처를 안고 사는 그 자신이 아니라, 그 옆에 존재하는 나일테니까. 적어도 함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고, 지켜봐주는것 역시 사랑하는 사람의 몫일테니, 그만 욕심과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릴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사랑이 있기에 사람들은 인생을 견뎌내기도 하고, 바람에 흔들려서 잎사귀가 다 떨어져나갈지언정 살아내는 것일지도.


***2006년 4월에 썼던 글....그대로 가져옴. (출처는 윤선영의 사이좋은 세상)
도대체 2년전에 ... 난 사랑을 했나?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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