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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과 불의 노래 이 판타지 소설은 사실, 깊이 있게 생각해볼 만한 주제는 없는 편이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문학적 감수성이 부족하고, 독자의 가치관을 뒤집어 놓을 정도로 거창한 사상 역시 부족하다. 그런데, 이 성경책보다 두꺼운(일단 기동성 면에서 낙제점인) 책을 여섯권이나 사서 본 이유는 단지 재밌어서, 였다. 나는 이 책을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한 이유들(문학적 감수성 부족, 주제의식 부족) 때문에 반지의 제왕과 비교하고 싶지만, 그 점을 떠나서, 재미만 놓고 봤을 때는 반지의 제왕을 앞선다. 이 긴 미국 판타지 소설은, 삼국지 류의 대하 서사시 정도나 되어야 느낄 수 있는 웅장함과 비장함, 스케일적인 측면에서의 감동을 고스란히 살리고 있다. 게다가 작가가 가진 발군의 스토리텔링 능력(치고 빠지는 식의)은 자.. 더보기
판의 미로 - 이 글은 몇 달 전 개인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약간 손본 것입니다. 판의 미로는 잔혹한 판타지다, 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약간 망한 듯한 케이스입니다. 우리 나라 여자들은 무서운 건 참아도, 잔혹한 건 또 못 참지 않습니까. 판타지 영화가 잔혹하다니. 대가리를 쪼개고 입을 찢는 잔혹함과 판타지 영화라면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를 떠올리는 관객 사이의 괴리감이 이 영화를 마이너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영화 쯤으로 여기게 만든게 아닐까요. 어쨌든 이 영화를 누군가와 같이 보기는 포기했고(근처 사는 지인들 중에 영화를 같이 보러 갈 만한 여자들은 이런 영화를 안 볼 것이고, 남자들 중에서는 단둘이 영화를 같이 보러 갈 만한 사람이 없지요), 궁금하긴 하고 해서, 얼마 전 아는 형 결혼식에 포항으로 내려가는 .. 더보기
동경 라이브하우스 탐방기 - 야네우라 (屋根裏) 동경 출장 명령이 떨어졌을 때, 가장 기대했던 것은 시부야의 라이브하우스 야네우라(屋根裏)를 다시 한 번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야네우라는 작년 여름에 우연찮은 기회로 알게된 라이브하우스인데, 그 때 일본의 언더그라운드 락 밴드 음악을 생생하게 접했던 것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던 터다. 라이브하우스는 홍대 앞의 인디 밴드 공연 클럽과 같은 식의 언더그라운드 공연장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XJAPAN, 라르캉시엘, 글레이 같은 초대형 밴드들도 역시 초기에는 이 언더그라운드 공연장에서 실력과 명성을 다져 지금의 위치에 이르른 것이다. 일본 음악계에 기획사의 기획으로 포장되어 순식간에 인기를 끌어버리는 아이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밑바닥에서 실력을 검증받은 뮤지션들이 오버그라운드로 올라와, .. 더보기
몽상가들 칼은 어린아이가 들었을 때 가장 무섭다. (정권을 바꾸었기에) 성공한 혁명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68 혁명은 학생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몽상가들"의 쌍둥이 주인공들은 어린아이였다. 어린아이들처럼 방종했고, 무책임했으며, 순수하게 서로를 탐닉했다. 누나 앞에서의 마스터베이션과 남동생 앞에서의 섹스는 외설적이라기보다는 원시적인 방종이었다. 금기가 없는 한 달간, 그들은 서로를 자극하고 자극받았지만, 조금 엉뚱한 결론으로 그들의 놀이는 끝을 맞는다. 68 혁명에 가담하는 혁명가들의 운명같은 사랑과, 애증, 또는 혁명 그 자체에 대한 극적 설명 등을 다루는 영화일 것이라 예상했던 나는, 이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좀 당황스러웠다. 치기를 벗지 못한 세 젊은이들의(그것도 둘은 쌍둥이 남매) 성적인 모험이 대부.. 더보기
무지개 여신 - Rainbow Song "우유부단한 면도 좋다 근성 없는 면도 좋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도 좋다 둔감한 면이 좋다 웃고 있는 얼굴이 가장 좋다.." 추억은(떠오르기만 한다면) 말라 비틀어져가고 있는 심장을 쥐어 짜내는 어떤 근원적인 힘이 있다. 그 힘에 의해 떨어지는 것이 땀이든, 눈물이든, 또는 피든 간에. 추억과 함께 앨범 속에 남아 있는 뿌옇고 쓸데없이 밝은 한 장의 사진과 같은 이 영화는, 심지어 대학 시절까지 벌써 추억으로 변모해버린 내게, 뭉클한 심장의 탈수 현상을 일으키게 하였다. 화면은 시종일관 부드럽게 흔들렸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작품인 "지구 최후의 날 The End of the World"를 찍을 때 사용되는 구식 스프라이서 카메라와 코다크롬 필름의 조합과도 같은, 하이라이트가 극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