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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분화구


(심심해서 써 봤던 시시껄렁한 소설이니 널리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Fujifilm S5Pro + Tokina 12-24mm



1.

세계에서 몇 번째로 크다고 한국어로까지 친절하게 자랑하고 있는 아소산의 분화구는 사실 대단한 장관은 아니었다. 뭐 내 생전 활화산의 분화구를 본 적이 없으니,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좀 가소로울 수는 있다. 하지만 HD TV로 본 남태평양 어딘가의 화산처럼 뻘건 용암이 튀어오르는 것도 아니고, 매캐한 연기만 내뿜는 그 시시한 분화구에서 어쩌다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버렸는지.

분화구는 넓었고, 마치 목장의 그것처럼 나무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지만, 그 너머가 가파른 절벽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분화구 중심을 원점으로 하는 나이테와 같은 색색 지층의 동심원이 부드럽게 넓어지다 내 발 언저리까지 이르러 있었을 뿐이다. 외향적인 서양인 하나가 용감하게 나무울타리 위에 올라서서 지나가던 일본인들에게 독사진을 부탁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고보니 굳이 이유를 대자면, 천둥같은 용암 소리만이라도 들어보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소산 정상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아소역으로 되돌아오려던 나는 케이블카의 분화구쪽 정착장에서 왈칵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케이블카의 운행 시간이 끝나 있었다. 운행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관리인의 일본어 방송이 나오자, 사정을 몰랐던 관광객들이 많았던지 잔뜩 늘어선 줄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비가 오기 시작해서, 이쯤 하고 내려갈까, 하는 생각에 터덜터덜 비를 맞으며 케이블카 타는 곳에 와본 것이니까, 줄의 끝에 서 있던 나는 별 수 없이 아소산을 걸어내려갈 각오를 다져야만 했다.

차라리 비가 오는 것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엉뚱한 눈물이 계속 뺨을 흘러내렸다. 짧은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질문을 한 끝에, 역에 도착할 때 즈음해서 완행 전철이 지나갈 것이라는 희망과, 아소역으로 내려가는 길이 포함된 약도를 얻을 수 있었다. 이미 비 쯤은 아랑곳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머리카락(출국 전에 자를까 말까 고민하다 자르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혼자 와서 무슨 예쁜 사진을 찍겠다고.)과 짐은 잔뜩 젖어 있었고, 운동화 앞 부분이 젖어오기 시작한다. 여의치 않은 상황이지만, 어떻게든 힘을 내야겠다는 다짐을 끌어모으며 발걸음을 재촉하려던 순간, 명랑한 목소리가 손을 흔들었다.

"Hey, we'd better try a hitchhike!"

케이블카 정착장 바로 아래의 주차장 입구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서양인이 엄지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나를 불렀다. 일본인들의 차량이 힐끔거리며 그를 지나치고 있었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이 즐겁기만 한 듯 밝은 표정이었다. 한 달간 오지 탐험을 할 수도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그의 배낭에 다행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지, 그는 흰색 반투명한 우비까지 걸치고 있었다. 망설이는 내게 그는 밝은 미소로 동참을 요구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해가 났다.



2.

외국인에게 친절하기 짝이 없는 일본 사람이지만, 산소통만한 배낭을 메고 웃고 있는 서양 남자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폭삭 젖은데다 눈이 퉁퉁 부어 있는 동양인 여자의 무임승차를 허락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우비를 벗어 망또처럼 두른 그와 머리를 풀어헤친 나는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간 화산을 터덜터덜 걸어내려왔다. 내가 궁금할 터인데 별로 말을 걸지 않는 그가 궁금하다. 못 본 척 하며 조금씩 뜯어보니 짐 케리를 닮은 것 같다가도, 볼록 나온 아랫배가 우습다. 담배갑반한 일제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든 그는 예의 그 즐거운 표정으로 아스팔트 도로변 이곳 저곳을 찍으며 나를 앞서가다 뒤서가다 했다. 조금 약이 올랐지만 모른척하고 있는 내게 결국 그는 먼저 말을 걸고 만다.

"Hey, what is your next schedule?"

따라오기 위해 한 질문인가, 싶어서 조금 망설이던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I don't know, a HANABI?"

"That's great! Is there a HANABI in this island today?"

"Yeah. Near Fukuoka."

"Then... but... Haven't you decided yet?"

어려운 질문이다. 여행을 오기 전에 만들어둔 일정에는 분명 오늘 저녁에 후쿠오카 근처의 한 마을에서 열리는 작은 하나비가 적혀 있었지만, 아소산의 분화구는 내 팔과 다리를 묶어 높은 곳에 걸어놓은 것처럼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심장과 폐를 관통당해 쓰러진 채로 거친 숨을 내쉬는 병사처럼, 마음 어디엔가를 제대로 꿰뚫은 상처는 이렇게 무법자처럼 침입해 와서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 숨이 차올라 황소처럼 씩씩거리던 나는 말없이 멈춰섰다. 한참을 앞서 내려가던 짐 케리를 닮은 그 남자는 나를 뒤돌아보고 되짚어 올라왔다. 벌써 바짝 마른 우비를 벗은 그는 그것을 바위 위에 깔고 탁탁, 두드렸다.

"Thank you."

일부러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우비 위에 앉은 내 옆에 선 그는 그 커다란 가방으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고마웠지만, 경멸하듯 괴롭히며 나를 실신 직전으로 몰아가는 뜨거운 태양을 핑계로 나는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I'm sorry, but, you need to see this."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내게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작은 디지털 카메라의 뒤쪽 액정엔, 분화구에 빨려들어갈 듯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있는 내 옆모습이 찍혀 있었다.

"Are you... Were you watching me?"

"I'm sorry. I'll erase this one right away if you want."

"... No you don't have to."

내가 벌떡 일어서자 그도 따라 일어섰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익숙한 모양이 아닌 이국의 화산은, 마치 친구의 엄한 엄마처럼 낯설고 힘들었다. 어정쩡한 키의 나무 군락이 빽빽히 들어섰다가도, 이내 호수를 낀 평원이 나타났다.
 


3.

힘들게 걸어내려와서 맞닥뜨린 아소역은, 처음 봤을 때보다 더 황량하고 작았다. 후쿠오카로 가는 완행열차 표를 구한 나는 대합실이 답답해서 승강장으로 나갔다. 낯선 화산 지형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이 작은 도시는 맑고 청명한 하늘 때문인지 이질적이고 낯설었다. 승강장에 놓인 낡은 의자에 웅크리고 앉은 나는 난데없는 한기와 쓸쓸함을 느꼈다. 후쿠오카 행 같은 열차를 탈 것이면서도 마치 일행이 아닌 듯 짐짓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다니는 그가 무서웠다. 아니 두려웠다. 난간에 기대어 분화구를 향해 몸을 숙일 때, 그 순간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아차려버린 그를 피하고 싶었다. 동시에 내 충동을 감지한 그가 뭐라고 한마디라도 말해줬으면, 너는 잘 이겨냈다고, 새로운 대지가 분출하는 그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유혹을 잘 견뎌냈다고, 격려해주면 무너지듯 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죽음은 없다고.

"Would you mind if I join you?"

"Not at all."

그늘처럼 어느새 내게 다가와선 그를 향해, 눈물에 뒤범벅이 된 나는 마음을 풀고 환하게 웃었다.

"And I hope you to watch me."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