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민

어톤먼트 (Atonement) - 속죄의 대 서사시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은 인류가 즐기는 가장 오래되고도 여전히 인기있는 오락의 하나이다. 경험해볼 수는 없는 일에 대한 간접적인 체험, 살아나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여 동질감 또는 반성을 이끌어내는 순기능, 등으로 인해 일상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영화는 스토리텔링의 가장 종합적인 표현 방식이다. 애니메이션만큼 자유롭지는 않지만 보다 현실적이고, 연극만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보다 효과적이다. 뮤지컬이나 오페라만큼 청각을 자극하지 않지만, 시각을 적절히 제어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그 실체가 모호할만큼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는 변신로봇과 같은 괴물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Universal Studios



어톤먼트는 로멘스와 배신, 증오와 애정과 같은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의 인기요소들이 절묘히 혼합된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원작의 이야기로서의 인기요소들이 영화라는 장르로 표현되었을 때 어떻게 하면 가장 재미를 극대화할 수 있을지 숙고한 흔적이 너무나도 역력한 작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Universal Studios



세계대전은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적 주도권을 쟁탈하기 위해 벌어진 비극이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이탈리아, 거기다 미국과 일본까지, 그들은 자국의 풍요로움이 식민지 수탈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깨닫고 있었고, 그 양극화된 풍요로움이 사실은 인간이 미쳐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 채 결국 다가온 파멸을 막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전쟁을 자세히 그리고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몇가지 점에서 전쟁이 인류사에 의미하는 바를 줄거리에 치밀하게 반영하고 있다 - 브라우니의 로비에 대한 미성숙하고 비현실적인 애정은 착각과 거짓말에 의해 파국으로 치닫는다. 신분과 계층의 벽을 과감히 깨뜨리지 못하고 서로를 탐색만 하다, 결국 서재와 파티라는 비정상적인 장소와 시점에 감정의 폭발을 일으킨 세실리아와 로비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다. 초콜렛의 달콤함은 거대한 부정과 파멸을 일으키고, 이미 벌어진 재앙 앞에서 개인이 사태를 돌이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모든 비극에는 그 원인이 있을텐데, 이 이야기에 일어나는 비극의 원인들은 하나같이 미성숙한 인간의 감정과, 지혜롭지 않음에 기인한다는 것은 기묘하게도 전쟁과 맞아들어간다. 해석하는 사람의 개인적이고 모호한 느낌이라고만 하기에는, 영화를 구성한 방식이 너무나도 그러하다. 무언가 심하다 싶은 생략 뒤에 갑작스럽게 중요한 사건(연못 씬, 서재 씬, 전쟁 씬 등)이 일어났다 싶으면, 어김없이 그 원인을 거슬러올라가 시간을 재배치하여 차근차근 부연 설명에 들어가는 이 기법은, 원작에 이미 드러나 있는 비극의 원인을 탐구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엿보인다.

이 영화는 동일한 줄거리를 영화로 만들었을 때, 더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화적인 완성도가 높다. 전술된 교묘한 줄거리의 재배치 뿐만 아니라, 복잡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극중인물의 타이핑 소리가 다급한 배경 음악과 공교롭게 맞아들어가는 것, 퇴각을 위해 해안에 모여있는 영국군을 5분간의 롱테이크로 담은 스펙타클한 장면에 흘러나오는 음악은 일순간 당당한 군가와 절묘하게 맞아들어간다. 종합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솜씨다.

영화사에 또 하나의 걸작이 추가되는 시점을 목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