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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1Q84 - 무라카미 하루키

   이것저것 핑계로 한동안 책을 못 봤습니다. 하지만 하루키 신작이 나왔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읽어야죠. 다 읽은 지 이주일이 됐지만 또 이 핑계 저 핑계 대다가 이제서야 글을 한 편 쓰게 됐네요. 매일매일 1분 20초의 12문장 짜리 글만 쓰다보니 이렇게 긴 글은 자신이 없네요. 그래도 한 번 시작해 봅니다. 1Q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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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하루키의 전작을 읽지 않으면 쉽게 이해하기가 힘들 수도 있다고 미리 말씀 드립니다. 어떻게 보면 이건 이번 작품의 특징이며 장점이자 단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특징이라면 이번 작품 1Q84는 하루키의 전작들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 장점이라면 과거 작품들에서 조금은 애매모호하고 단편적으로 다뤄졌던 부분들이 좀 더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표현된다는 것. 단점이라면 동어반복, 즉 과거의 이야기를 또 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3권도 나온다고 하니 장점이 좀 더 부각되는 게 사실이네요. 좀 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는 거니까요.

이번 작품은 워낙 많은 것들이 담겨 있어서 무엇부터 이야기 해야할지 헤매게 되는데요. 일단 겉부터 핥아보겠습니다. 주인공은 아오마메와 덴고. 아오마메의 이야기와 덴고의 이야기가 한 꼭지씩 번갈아가며 나옵니다. 전작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죠. 이번 작품에서도 원더랜드 때처럼 과연 완전히 다른 것 같은 두개의 이야기가 어떤 연관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굉장히 큽니다. 원더랜드 때의 결말은 굉장히 애매모호합니다. 두개의 이야기가 연결된 듯 되지 않은 듯. 좋게 말하면 열린 결말이고 나쁘게 말하면 불친절하죠. 써뒀던 결말은 두 가지였는데 하루키의 부인이 열린 결말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굉장히 친절합니다. 두 이야기는 확실히 연결돼 있으니까요. 이런 점은 좋지만 그래도 결말은 열린 결말. 두 이야기는 연결되지만 결국 두 주인공의 행적은 애매모호합니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더 이상 이야기하기가 부담스럽네요.

   이번엔 소재. 하루키는 아마 옴 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독가스 살포 사건으로 인해 종교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사건을 다룬 르포 형식의 '언더그라운드'를 개인적으로 너무너무 좋아하는데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인생의 대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독가스 살포 사건을 계기로 인생이 어떻게 변하는가가 굉장히 흥미진진합니다. 소설이 인생의 연장이라고 한다면 그 안에는 개개인의 사람,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인생이 모두 소설이 되는 셈이니까요. 어쨌든 이번 작품에서도 종교, 특히 대중화되지 않은 신흥종교를 등장시킵니다. 저 스스로도 종교 특히, 신이라는 존재는 앞으로 더 부각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요.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명제를 진리라 한다면 과거 신본주의 사회에서 르네상스를 통한 인본주의, 다시 신본주의가 시작될 거라는 단순한 논립니다. 물론 현재의 신본주의에서 신은 뭐가 될지는 모르죠. 인터넷이 될 수도 있고, 돈이 될 수도 있고. 확실한 것은 다신(多神)이 될 거란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작품에서도 주인공 아오마메는 증인회, 좌파 모임이었던 '선구'가 발전한 신흥종교 등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하루키의 시선인거죠. 물론 긍정적으로 바라보진 않고 있습니다. 증인회로 인해 아오마메는 가족과 헤어져야 하고 '선구'는 총격전을 벌이니까요. 독가스를 뿌린 옴진리교가 창시된 것도 1Q84와 일본어로는 발음이 같은 1984년의 일입니다.

   종교라고 한다면 선과 악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어둠의 저편'이라는 하룻밤만에 읽을 수 있는 별로 인상적이지 않은 그의 장편소설에서 절대 잊혀지지 않는 한 장면을 이야기해야할 것 같네요. 바로 마지막 장면. 콜걸을 살해한 프로그래머가 휴대전화를 편의점 판매대에 두고 가는 장면입니다. 소설을 읽는내내 이놈은 죽어야 돼, 벌 받아야 돼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그는 유유히 새벽 공기를 가르며 사라집니다. 증거품인 휴대전화마저 가판대에 두고 나오지만 그는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이게 현실인거죠. 소설을 통해 희망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나쁜 놈이 벌 받지 않는 세상. 어둠 속의 댄서에서 눈 먼 셀마가 교수형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게 바로 현실이니까요. 결국 현실 속에서는 단순히 악이라고 해서 처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악이 처벌 받지 않는다? 그럼 선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저런 악을 그냥 둔다고? 의문은 이어지게 되죠.

   그렇다면 종교를 통해 선과 악을 이야기하는 하루키가 바라보는 선이란 무엇일까요? 상실의 시대에는 이런 명제가 나옵니다. 예전에도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요.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하루키는 선과 악에 대해서도 비슷한 견해를 보입니다. 선이라는 존재가 반드시 악을 처단하는 것은 아니다. 악 역시도 선을 잡아먹으려는 것이 아니다. 선과 악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있다. 그냥 그 모습 그대로.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쪽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가 가장 좋은 상태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관계처럼 말이죠. 언제나 현실이라는 건 단 하나뿐입니다. 단 하나 뿐인 현실이 제대로 균형잡혀 있나요? 악의 대항마인 선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나요? 요즘은 아닌 것 같네요. 균형은 흐트러지고 아오마메가 출구가 없는 입구를 통해 1984년에서 1Q84년으로 이동해 버린 것처럼 지금의 세상은 어딘가 분명히 뒤틀려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하늘에 달이 2개 떠 있는 것처럼 말이죠.

   종교가 됐던 선과 악이 됐던 뒤틀린 사회가 됐던 간에 이런 어려운 이야기를 전부 집어치우고 정말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1Q84는 혼란스런 세상 속의 순수한 사랑이야기에 불과합니다. 10살 때 단 한 번 서로의 감정을 주고 받은 아오마메와 덴고는 평생을 서로를 잊지 못하고 지냅니다. 아오마메는 작업을 끝낸 뒤 머리가 적당히 벗겨진, 멋진 두상을 가진 중년의 남성을 사냥해 잠자리를 가지고 덴고는 매주 금요일 유부녀 애인이 자신의 일주일치 성욕을 뽑아내 가지만 결국엔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깁니다. 후카에리와 함께 뒤틀어 버린 1Q84의 세상으로 아오마메가 오게 된 것도 덴고가 그녀를 강하게 원했기 때문이죠. 10년 전 단 한 번의 인연이 평생을 가는 이런 사랑을 여러분은 경험해 보셨나요? 아니 믿어지나요? 솔직히 10년 전에 만난 사람이 누군지 기억이나 납니까? 물론 전 납니다 ㅋㅋ 중요한 것은 유년기의 성폭행을 이야기하면서 평생을 이어지는 순수한 사랑을 떠벌리는데 그 이야기가 묘하게 공감이 간다는 겁니다. 다른 남자, 다른 여자와 잠을 자지만 결국 난 니가 필요해라고 하지만 서로도 그걸 이해하고 독자도 거기에 공감합니다. 소설 속의 후카에리와 덴고가 만들어낸 공기 번데기가 그렇듯이 하루키의 1Q84도 판타지에 묘한 사실감을 부여합니다.

   소설 속의 소설인 후카에리의 공기 번데기는 하루키의 소설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에 묘한 사실감을 부여한다는 것. 문장을 읽고 있으면 리듬감이 생긴다는 것. 신선한 발상의 묘사가 있다는 것. 어쩌면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관을 공기 번데기를 통해 이야기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해변의 카프카가 노벨 문학상 후보였다는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얼핏 들은 거 같은데. 어쨌든 지금 다니는 회사의 최종면접에서 하루키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질문은 하루키 소설을 어떻게 생각하냐? 제가 자기소개서에 하루키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였죠. 대답은 이거였습니다. 하루키 소설은 인종, 연령, 성별을 뛰어넘어 공감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노벨 문학상은 받지 못할거다. 왜? 일본인 주인공에 먹는 건 스파게티, 듣는 건 재즈와 클래식, 배경은 일본이지만 버거킹과 맥도날드가 있기 때문이다. 즉, 전 세계 누구라도 공감하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특별함이 부족하다. 특히, 해변의 카프카는 하루키 스스로도 어느 연령 때의 누가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을 쓰겠다고 다짐하고 만든 작품입니다. 10대의 남자 주인공과 10대의 여자, 30대의 트럭 운전수와 할아버지, 게이인 여성인지 레즈비언인 남성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캐릭터 등 다양한 인간 군상으로 누구나 한 명은 그 캐릭터에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소설을 만들어 냈죠. 하지만, 캐릭터의 강한 색깔과 개성은 역시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루키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1Q84가 될 가능성은 높아 보입니다. 주제는 동어반복이 될 수 있겠지만 이 시대의 문제점, 이 시대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 등을 초현실적이지만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니까요. 특히 문장의 리듬감은 절정에 이른 듯 한번 읽기 시작하면 놓기 힘들 정도로 신이 납니다. 이야기의 흐름도 한 몫 하겠지만 리듬감은 과거 남발하던 기묘한 묘사가 줄면서 더욱 살아났습니다. 주제, 캐릭터, 형식 삼박자가 갖춰졌으니 즐겁게 읽을 수 있죠.

   책을 다 읽는데 거의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예전이었다면 이틀 분량인데 말이죠. 벌써 2년차가 다 끝나가지만 사회 생활은 역시 힘들군요. 이번 달에 이사를 하고 침대를 사고 책장을 사고 독서대를 살 겁니다.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시작으로 1Q84까지 다시 한 번 읽을 생각입니다.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네요. 그 때가 되면 또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덴고가 공기 번데기를 완성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 처럼 말이죠. 매일매일 남의 이야기만 하다보니 저의 이야기를 못하는 놈이 돼버렸네요. 슬픈 일입니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그렇게 변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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