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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right

영화 혹은 예술, 그리고 attitude

나는 겸손한 영화가 좋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제는 진보적이되 극단적이면 피곤해지고, 비주얼이 지나치게 두드러져도 불편하다. 예술 영화인 체 하면 콧방귀부터 나오고, 그렇다고 깊이 없이 팔랑거리면 곤란하다.

근래에 본 영화를 예로 설명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Into the Wild’보다는 덜 진보적인 이야기여야 하며, ‘Speed Racer’보다는 절제된 영상을 보여줘야 한다. ‘Iron Man’처럼 적당히 변주할 줄 알아야 하며, ‘The Mist’처럼 오락영화인 척 현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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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Into the Wild(짜르방)

이것은 내가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백에 달하는 영화들을 보아온 경험을 통해 가지게 된, 영화에 대한 일종의 개인적인 취향인데, 다르게 말하자면, 내가 심리적으로 가장 만족을 느끼는 영화의 조건을 파악하는 기준이며, 영화가 가진 작품성과 오락성의 가장 (나에게) 적합한 조합을 인지하는 감각이라 하겠다.

결국 내가 겸손한 영화를 좋아하는 건 과장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는 예술적 대상 혹은 경험에 대해 심리적으로 가장 안정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는 가리지 않고 어떤 영화나 즐겼던 것 같다.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경험에 더 의미가 있었던 시절이었다고나 할까. 남들이 소설을 읽고, 농구를 하는 동안 나는 영화를 보고 있었으니, 나는 영화를 통한 경험과 함께 성장한 셈이다. 그 시절에는 모든 영화가 새로웠으며, 언제나 놀라움과 경이 속에 영화를 봤다.

받아 들일 것은 받아 들이고, 버릴 것은 버리며 나는 컸고, 그렇게 취향이 생겼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세상 혹은 그 이상과 교감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로서의 영화는 그대로지만, 내가 변한 것이다. 나의 감각에 비춰 과하거나 모자란 영화가 생겨났으며, 내 입맛에 맞는 영화는 온갖 미사여구를 다해 칭찬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영화에 대해서는 냉담했다.

어쩌면, 내가 겸손한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닌 내가 겸손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도, 새로운 이야기가 감히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와 혼란을 준다는 것 자체가 못마땅하고, 무엇보다도 놀라움과 경이 끝에 오는 ‘변화’가 내겐 필요치 않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이다.

예술은 변화이며, 그 변화는 예술적 대상 그 자체가 아닌, 자아와 예술적 대상이 조우하는 그 시점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은, 깨닫기보다 실천하기 어려운 진리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주저 앉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사람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술은 새로운 가능성이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대안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겸손한 영화도 좋고, 취향도 좋고, 감각도 좋지만,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너그러이 마음을 열어 주는 애티튜드(attitude)가 내겐 더 필요한 것 같다. 주저 앉기엔 아직 나는 너무 어리고, 변화를 부정하기에 나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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