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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웨이와 삶의 여행

[사이드웨이와 삶의 여행]

*주의: 스포일러 있음


영화 ‘사이드웨이’에는 여행을 함께 떠나는 두 남자가 등장한다. 와인을 좋아하고 전처를 잊지 못하는 순정파 작가와 결혼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화려한 밤들을 보내고 싶어하는 한물간 배우. 둘은 취향도 다르고 이 여행에서 바라고 있는 것도 다르지만, 함께 짧지만 의미있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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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는 참 많은 종류가 있겠지만, 나는 여행의 중요한 구성 요소들 중 하나가 ‘함께 여행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니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다고 본다. 혼자서 하는 여행에 대한 글들을 읽을 때면, 그 자유로움과 낭만에 대한 꿈을 꾸곤 했지만, 내 경험은 그렇지만은 않았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서 여행할 기회가 생기기는 했지만, 그것은 좀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지는 않았다. 물론 새로운 것들을 보는 즐거움은 있었지만, 글을 적어 보려 해도 오히려 밤 늦은 시간 혼자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을 때보다 잘 써지지 않았고, 멋진 사진을 찍으려 해도 뭔가 깊은 감상이 우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카메라를 아예 챙기지 않게 되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던 내가 갑자기 여행에서 사진을 멀리하게 된 것은, ‘공감’에 대한 괴리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내게 정말 재미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여행은 오랜 친구, 서로의 거의 모든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던 친구와 함께 떠난 일본 여행이다. 그전까지 여행다운 여행을 제대로 해 볼 기회가 없었던 나는 디카도 구입하고 빈티지 풍의 여행 수첩도 내 것 하나, 친구 것 하나 장만했다. 워낙 먹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는 반드시 먹어 볼 것에 대한 리스트만 열심히 준비해서 여행길에 올랐다. 나는 참 열심히도 여행일기를 썼던 것 같다. 그림도 그리고, 영수증이나 표 같은 여행 중에 얻은 것들도 붙이며 일기를 꾸몄다. 매일매일 밤은 친구와 키득키득거리면서 일기를 쓰고, 서로의 일기를 읽어보고 잔액을 확인하며 다음 날의 여행 계획을 정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돌아와서도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열심히 사진들을 올리며 즐거웠던 시간을 되돌아보곤 했었다. 지금도 그 친구를 만나거나, 그 일기를 꺼내 보면, 그 때의 즐거운 기억이 새삼 되살아난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다른 친구들과는 그 당시에도 그런 즐거움이 잘 공유가 되지 않았었다. 여행일지나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줘도 ‘음, 그렇구나.’ 이상의 느낌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입에 붙어 있던 “그 여행 진짜 재밌었다. 여행 또 가고 싶다.”라는 말도 어느 샌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혼자서 하는 여행에서 사진을 찍다 보면 문득 그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적어도 같이 여행을 했던 친구와는 공감을 할 수 있었는데, 이 여행은 그 누구와도 공유가 되지 않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더 이상 셔터를 예전처럼 누르지는 않게 되었다. 사진에 얽매이지 말자. 그저 내 머리에, 가슴 속에 담아두고 나의 양식으로 삼는 것으로 만족하고 누군가에게 보이려고 노력하지 말자.

그러던 어느 날, 뉴질랜드의 백팩커(여행자 숙소)에서 머무르고 있던 나는 내 생각을 새롭게 바꿔주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니 어떻게 그것밖에 안 먹어?”라는 어색한 관심으로 말문을 틀 수 있었던 핀란드 친구와 “아니 정말 그거 너 혼자 다 먹을거야?”라는 장난스런 말로 말문을 틀 수 있었던 말레이시아 친구. 그들과 보낸 시간은 단지 몇 일에 지나지 않았지만 마치 오랜 친구인 것 마냥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여행을 즐길 수가 있었다. 나는 그러다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아니 왜 이 사람들이 이렇게 편하게 느껴지지? 나에겐 한국에 나를 기다리는 많은 친구들이 있는데, 왜 그 친구들보다 이 사람들이 더 가까워 보이지? 그 친구들은 갈수록 나와 공유하는 것들이 없어져 가고, 멀어져만 가고 있는데……

어린 시절의 나는 사람을 사귀는 것이 좁고 깊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저 마다 다르고, 살아온 생활이 다를수록 그 차이는 큰데, 서로를 이해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냐라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친구들보다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친구들에게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곤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삶을 시작하게 된 대학 생활 동안 변하기 시작했고, 다시 그 생활을 떠나 낯선 곳을 여행을 하면서 또 한 차원의 변화를 겪을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결국 가장 가까운 친구는 ‘가장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만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리고 가장 좋은 여행은 혼자 떠나서,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이드웨이에서 작가인 주인공은 계속 배우인 친구에게 구박받으며 끌려 다닌다. 사실 여행의 목적 자체가 그 친구를 위한 총각파티 성격이 강했는데, 여자 사귀는데 도움은 주질 않고, 방해만 하고 있다는 이유이다. 결국 그 친구는 여자를 ‘꼬시는’데 성공해 여자와 시간 보내기에 바쁘고, 주인공은 모텔에 혼자 남아 친구 뒷수습이나 하는 처지가 된다. 이런 상황과 개인적인 문제들이 겹쳐 둘은 다툼도 벌이지만, 친구는 이렇게 항변한다. “와인도, 문학도 이해하는 네가 왜 나의 성욕은 이해를 못해?” 여행이든 삶이든 뭐든, 같은 자리에 있는 동반자라는 것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다르기 때문에 이해를 하려는 서로의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이 영화가 유쾌한 것은 이것이 친구의 결혼식전 연애 해프닝만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이다. 친구에게 끌려만 다니던 주인공은 실언으로 친구의 비밀을 누설해서 친구가 곤경에 빠지지만 시치미를 뚝 떼기도 하고, 관심 있는 여자에게는 그 친구는 대학 동창일 뿐이지 잘 알지도 못한다며 자기는 전혀 다르다고 말하는 등 지금까지와는 정 반대로 자기 살 길만 생각하는 얌체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친구가 판타지스러운 여행 혹은 일탈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갔을 때, 주인공은 친구는 꿈만 꾸고 이루지 못한 여행지 로맨스의 해피엔딩을 자기가 실현시키러 달려 나간다.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인생은 여행과 같다.’는 흔한 말을 떠 올렸다. 정확히는 혼자 떠나는 여행일 것이다. 둘은 여행을 같이 떠났지만, 사실은 각자의 여행길에 서로가 잠시 동반자였던 것뿐일 수도 있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여행에서 새로운 동반자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리라. 결국 인생 속에서 사람은 혼자이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새로 만나고 어울리고, 때로는 헤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기왕이면 내 여행에는 많은 좋은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푸른 눈의 친구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본다. “나는 행복한 사람들이 좋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위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나는 아직 행복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고, 분명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있을 지,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야.”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나의 삶을 채워 나가야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