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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티드, 당신이 말하는 대의

[원티드, 당신이 말하는 대의]

*주의: 스포일러 가득


 ‘원티드’는 상당히 도발적인 영화이다.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그 시간에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따져 묻는다. 만약에, 이 영화가 전형적인 선악구도의 영웅 스토리를 담고 있었다면, 이런 도발은 그저 폭력적인 선동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원티드의 결말부에서 보여지는 ‘대의’에 대한 비판 의식은 대의가 남발되는 요즈음의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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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결사단들은 ‘운명’의 지시를 정의로 믿고 실천해 나간다. 누군가를 살해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의 삶과 행복을 지켜 줄 수 있다는 말은 얼핏 보면 이전의 많은 영화에서 보여졌던 정의의 개념과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완전한 존재가 되기 어려운 인간에게, 다른 사람의 운명을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 같은 것은 결코 주어지지 않았다. 사회적 정의라는 것은 양자가 자신의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토론과 타협을 통해 양자가 함께 이익을 거둘 수 있는 방향을 찾아 나아갈 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 간의 관계가 아닌 조직과 조직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조직이라는 것이 대개 공통된 이익을 위해 모여 자신들의 대의를 주장하는 것인 만큼, 조직 간에서의 입장 차이와 갈등은 개인 간에서보다 훨씬 큰 다툼으로 번지기 쉽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정부와 시민이 광우병 문제와 관련하여 큰 갈등을 겪고 있다. ‘시민’이라는 개념은 모호할 수 있으니 광우병 위험이 큰 미국소 수입에 대한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촛불문화제 지지자’라고 얘기해보자. 이들 사이에서도 FTA의 전면 반대냐, 재협상이냐 등, 많은 부분에 대한 의견 차이가 존재하지만, 이들의 공통적인 생각, 그리고 국민 대다수의 의견인 것은 지금의 미국산 소 수입 체계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정부는 ‘국민’을 위한다고 자처하며 대다수의 국민과는 상반된 주장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그렇게도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정부 인사들이 주장하는 ‘대의’의 주체가 결코 온 국민이 아님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정부를 지지하는 10% 남짓의 소수 국민들도 정부의 대의가 그들과 자신들만을 위한 대의, 혹은 ‘자의’에 불과할 뿐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촛불문화제 지지자들도 대의를 남발해서는 안 된다. 광우병에 대해서는 국민 다수의 의견이 합의가 되었을지 모르나, 다른 정치적 이슈와 폭력 등에 대해서는 합의된 바가 없다. 특정인들을 대상으로 마녀사냥을 하는 ‘네카시즘’도 대의명분을 붙일 수 없는 행위이다. 이 안에서의 분열은 또 다른 갈등 만을 만들 뿐, 본래의 대의와는 거리가 멀다. 정부의 입김이라는 분석도 있으나, 반촛불소송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모든 국민이 ‘촛불’을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부가 국민의 뜻인 미국소 재협상에 응하게 만드는 것이지, 현 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정부도 결코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모두의 이익을 위해 토론과 타협의 장으로 끌어들여야 할 대상임을 잊으면 안 된다.


원티드의 결사단들은 자신들의 정의, 자신들의 대의의 거짓이 드러나는 순간, 자멸하고 만다. 정부는 언제까지 거짓 대의를 주장하면서 국민과의 거리를 벌여만 나갈 것인가. 몇몇 정치인들이 촛불 문화제를 ‘배후세력의 음모’, ‘간접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인 천민민주주의’라고 주장하면서 질타를 받아 왔다. 그들이 정말로 민주주의의 의미를 바로 알고 있다면, 그 배후세력인 많은 시민들이 자신들이 받들어야 할 대의의 주체라는 것, 대의가 무너진 거짓된 간접민주주의 때문에 사람들이 직접민주주의를 외칠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론조작이나 위장이 아닌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