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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슬리와 국산 기술

[헉슬리와 국산 기술]

‘포인트블랭크’를 하려고 잠깐 피씨방을 찾았다가 정기점검으로 접속이 중단되는 바람에 난감해졌다. 예전 같으면 이럴 때엔 스타를 했겠지만, 지금은 스타는 자제하자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이전 포스팅 참조…) 그러다 마침 ‘헉슬리’가 기대작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이 기억나서 시험 삼아 접속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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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OFPS라고 하기에, 16인 이내의 팀플로 이루어지는 기존의 FPS(1인칭 슈팅게임)와는 대조적으로 ‘진삼국무쌍’같은 대규모 무차별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헉슬리’는 MMORPG이되 싸움의 방식을 FPS로 바꿔 놓은 정도의 느낌이었다. 어느 정도의 레벨이 되기까지는 혼자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레벨 업을 하는데에만 집중해야 하고, 사람들과 전투를 벌이려면 ‘인스턴트 던전’처럼 가상 전투장에서 많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 전투도 과거 퀘이크에서 겪었던 충격처럼, 뭐를 좀 해보기도 전에 사람들이 날아다니며 날 죽여 대는 상황이어서 (일반적인 FPS에서 리스폰했을 때 잠시 동안 주어지는 무적상태가 없는 것 같다.) 플레이하기도 쉽지 않았다. (내가 퀘이크류를 잘 못해서 그렇다는 것은 백프로 인정.) 하지만, 그렇다고 게임이 전반적으로 재미없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고, 사실은 미친 듯이 빠져들었다. 퀘스트들이 과거 ‘오니’나 ‘맥스페인’에서, 더 멀리는 ‘울펜시타인’이나 ‘둠’에서 느낄 수 있었던 어드벤처적인 느낌이 강해서인 듯하다.

그런데 ‘헉슬리’에 대한 정보를 더 얻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참 뚱딴지 같은 말을 보게 되었다. ‘기대작’이라는 말도 미국에서, 세계에서 선전하고 있다는 말도 다 좋은데, 문제는 ‘순수 국산 기술로 이뤄낸 쾌거’같은 표현이었다. ‘애국심 마케팅’이야 사실 영화계에서도 말이 많았고, 음반계에서도 말이 많았지만, 원칙적으로 나는 애국심에 호소하는 홍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산업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정말로 더 아껴달라고, 아껴주자고 호소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 문제는 말이 안 되는, 잘못된 얘기로 착각을 부추기는 데에 있다. 몇몇 블로그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순수 국산 기술로 만든 국산 게임이라 기대가 되요.” 아니 그런데 생각해보자. 우리가 하는 온라인게임 중에 국산게임이 아닌 게 얼마나 되는지. 최근에 주요 퍼블리셔들이 경쟁적으로 외산 대작 RPG들을 끌여 와서 그렇지 대부분의 온라인게임이 국산게임이다. 근데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저런 말을 해 놓고 몇 줄, 혹은 몇 문단을 내려가 보면, “언리얼3 엔진을 써서 그래픽이 대단해요.”라는 말이 나온다. 이게 무슨 어불성설인가. 외국산 엔진을 사서 만들어서 그래픽이 대단하다는데 그게 순수국산기술인가? 처음에는 그저 한 두 사람의 착각이려니 생각했지만, 그런 글이 한 둘은 아니었고, 신문 기사에서조차 ‘순수국산기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었다.

http://isplus.joins.com/life/lifes/200806/09/2008060909180071710801000008010200080102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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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이라는 말이 달리 엔진이겠는가. 자동차에서는 비행기에서든 엔진은 제품이 돌아가게하는 가장 핵심이 되는 부품이고, 게임 제작에서도 ‘엔진’은 게임의 틀을 잡는 핵심 소프트웨어이다. 게임은 우리 것이되 그 안에 들어 있는 엔진(정확히는 게임을 만드는 공장의 핵심설비라는 비유가 더 적절할 것 같다.)이 우리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핸드폰 기술이 아무리 세계적이어도 매해 퀄컴에 엄청난 로열티를 갖다 부어줘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 게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AVA’라는 게임을 제작하기 위해 레드덕이 ‘언리얼3 엔진’ 구입비로 들어간 비용이 10억이라고 하니, ‘언리얼3 엔진’를 이용한 국산 게임이 하나 늘어날 때마다 10억씩이 나간다는 얘기이다. 이 외에도 리니지2, 프리스톤 테일2, 마그나카르타 (에픽의 언리얼2 엔진), 서든어택 (모노리스의 쥬피터 엔진), 아이온 (크라이텍의 크라이 엔진), 스팅, 프로젝트 영웅전 (밸브의 소스 엔진), 레퀴엠 (밸브의 하복 엔진), 아크 온라인, 이스온라인 (랜드웨어 엔진) 등등 수많은 국산 게임들이 외국산 게임 엔진을 구입해서 쓰고 있다.

‘순수 국산 기술’이라는 칭호가 웹젠 측에서 퍼트린 이야기인지 사전조사도 하지 않은 기자에 의해 붙여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거북하다. 그런 칭호는 정말로 엔진까지 자체 개발을 했던 라그나로크, 뮤 온라인, 리니지1, RF온라인, 팡야, 카트라이더 같은 게임들이나, 가이블 등과 같은 게임엔진 제작사들에게 붙여주고 더 아껴주자. 국내의 대형 게임 제작사들이 그 동안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게임 엔진을 만들어 판매했다는 소식이 좀 들려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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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포인트블랭크(플레이엔씨에서 퍼블리싱하는 FPS)도 국산 엔진(제페토의 I-Cube 엔진)으로 제작한 것인데, 상당히 수준급입니다. 근데 사람이 적어서 심심해요. -_-;; FPS 좋아하시는 분들 한 번쯤 가셔서 테스트 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