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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가 쫓은 것은 봉준호 감독

[‘추격자’가 쫓은 것은 봉준호 감독]

스릴러는 영리해야 한다. 관객들의 추리력보다 항상 한 발짝 앞서나가야 하고 그들의 심리를 컨트롤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스릴러라고 하면 ‘반전’으로 드러나는 ‘범인의 정체’를 떠올리게 되지만, 이미 수많은 반전을 목격해서 영악해진 관객들을 속이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반전에 집착하다가 형편없는 이야기로 변질되는 영화를 우리는 참 많이도 봐왔다.

그러던 와중에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반전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국산 스릴러에 빛나는 성과를 안겨 주었다. 그가 택한 것은 ‘반전’의 긴장감이 아닌 ‘드러냄’의 긴장감이라고 할 수 있다. 기를 쓰고 연구한 트릭으로 범인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대놓고 알려 주면서도 연출력으로 극적 긴장감을 조성해내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영화의 문법이자 테크닉이다. 히치콕이 서스펜스를 정의하면서 든 예 (사람들이 포커를 치는데 테이블 밑의 폭탄이 갑자기 터지는 것은 놀라움이고, 사람들이 포커를 치는데 테이블 밑에 폭탄이 있는 것을 모르고, 관객들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서스펜스이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보의 공개가 정보의 은폐보다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많은 실패작의 제작진들이 착각하고 있는 부분은 스릴러에 반전이 들어가는 것은 긴장감을 만들어 재미를 주기 위한 목적인 것이지 반전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인 나홍진 감독의 영리한 스릴러 ‘추격자’는 성공한 선배 ‘살인의 추억’이 갔던 길을 그대로 쫓아 들어간다. 두 영화와 ‘괴물’까지를 함께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유사성들을 확인할 수 있다.

[주의: 스포일러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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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범인이 일찍 드러나고 잡히지만 풀어줘야 하는 아이러니
살인의 추억은 물론 그가 마지막까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남겨두긴 하지만, A를 범인으로 몰았다가 알고 보니 B가 범인인 것과 같은 일반적 반전 기법을 쓰지는 않는다. (봉준호 감독은 차기작 ‘괴물’에서도 굳이 그 정체를 숨겨 두지 않고 초반에 괴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두 영화는 모두 폭력 취조라는 잘못된 관행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거 불충분으로 진범조차 내보내고 마는 경찰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러한 장면들은 자연히 사회 부조리의 고발로 이어지며 현실에 지친 관객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준다. 헛다리만 짚고, 계속되는 희생자들을 바라만 보는 경찰은 공권력의 무능함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추격자는 여기에 정치인을 첨가하고 ‘괴물’은 정치인에 미군까지 끌어 들인다. 살인의 추억은 최소한 범인을 끝까지 추격해 잡으려는 사람들이 경찰이기라도 했지만, 추격자나 괴물은 그마저도 일반인들의 짐으로 남아 있다.

2. 범인에 대한 궁금증을 대신하는 것은 인물의 순간적인 결정에 의한 비극의 예상
살인의 추억의 하이라이트는 송강호의 아내를 따라가던 범인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여학생 쪽으로 바뀌는 장면이라고 본다. 관객은 두려움을 안고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그의 선택을 보고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게 된다. 결과는 예상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심리적인 효과를 낸다.
추격자의 하이라이트는 슈퍼마켓의 아주머니가 범인을 불러 세우는 부분의 시퀀스이다. 아주머니가 무슨 말을 꺼낼 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 올 지 관객들은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큰 공포감을 느낄 수 있다. 추격자는 초반부에서도 집사를 찾는 부부와 그들을 집안으로 들이기 위해 돌아서는 범인의 장면에서 동일한 묘미의 맛보기를 보여준다.
(괴물의 하이라이트는 괴물의 등을 밟고 뛰어 오르다 하늘에 정지하는 고아성의 씬 정도가 될 듯 하다.)

3. 논란의 여지를 남겨두는 설정
살인의 추억에서 봉준호 감독은 범인이 누구인지 확정 짓지 않기 위해 범인 장면의 촬영은 몇 사람으로 나누어 찍었다고 한다. 열린 결말로 관객들이 자유롭게 “범인이 누구일까?”라는 논쟁을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추격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김윤석이 아이의 아버지인가?”라는 점이다. 감독의 인터뷰에 의하면 그러한 설정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상영분에 보이는 면만 고려하면 그러한 연상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러한 열린 설정들은 스릴러에서 자주 쓰이는 방법이면서 ‘입소문’, 특히 온라인 상의 입소문이 중요해진 영화 마케팅 경향과도 효과적으로 어우러진다.

4.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
살인의 추억은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추격자는 ‘유영철 사건’을 각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유영철 사건’은 2004년도에 영화화될 만한 올해의 사건 1위에 오르기도 했으니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일 수도 있다. 이러한 끔찍한 스토리가 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포감을 스크린을 넘어 좀 더 가깝게 체감할 수 있게 한다. 일상 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죽음을 소재로 한 영화 ‘데스티네이션’이 그 어느 귀신 영화보다도 무서웠던 것과도 비슷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5. 남은 자들에게 주어진 것
연쇄살인사건의 비극은 남은 자들에게 변화를 남긴다. ‘살인의 추억’에서 주먹구구식이던 시골 경찰은 점차 냉철한 형사로 변해가고, 과학수사를 부르짓던 서울 경찰은 열혈 형사로 바뀐다. 둘이 변하게 되는 원인은 공히 좌절감이다.
추격자의 포주는 사람을 돈으로 보던 사회악에서 부성애를 보이는 사람으로 변해 간다. 가족 구성원을 잃고 타인과 유사가족 형태의 모습을 보이는 엔딩은 ‘괴물’에서 보여지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마지막에 보여지는 도시는 남겨진 그들이 비애를 안고 살아가야 할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살인의 추억’의 엔딩에서는 송강호가 범인 추적의 짐을 벗어 던지고, 아내(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생활인으로 변모해있다. 그는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관객들은 그 소소한 행복이 여학생의 죽음과 맞바꾸어 가능해진 것임을 알고 있다. 엔딩에서의 그의 표정은 그가 그 사건의 비극적인 기억을 평생토록 떨쳐내기 힘들 것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특징들이 그저 우연인지 의도된 벤치마킹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종합적으로 ‘추격자’를 완성도 높은 스릴러 영화로 만드는 데는 성공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물론 만약에 이 같은 구성이 고정이 되어 계속 비슷한 작품만 쏟아져 나온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추격자’는 한 편 정도는 나와도 될 효과적인 변주 같은 느낌이다. 얼마만큼의 흥행 성적을 낼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볼 만한 감독이 한 명 더 늘어난 것은 기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