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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 1: 주노 표절 논쟁

<뒷북 1: 주노 표절 논쟁>

대중 문화나 패션 상품이 계속적으로 쏟아져 나올 수 있는 원천은 기존의 것을 과거의 유물로 밀어 버리는 힘이다. 아무리 오늘의 가장 큰 이슈라도 내일이면 한 순간에 잊혀져 버린다. 만약 그것이 단순한 심심풀이용의 의미 없는 것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사실 이슈가 되는 것은 무언가 중요한 가치와 그에 대한 문제제기 혹은 반성을 담고 있는 것이기 쉽다. 태안반도 사태가 그러했고, 남대문 사태가 그러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것들 마저 얼마 동안의 흥미로운 이슈의 소재로 취급하고 며칠만 지나면 먼 과거의 일로 탈바꿈해버린다. 그러니 같은 문제는 다시 반복하고 잊혀지고 또 다시 반복할 수 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언론의 행태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이른 바 ‘냄비근성’ 운운하는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영화 주노에 대한 표절이 한 때 이슈화되면서 오가는 논란을 보면서 잘못되어가는 흐름에 답답함과 아쉬움이 들기는 했지만, 그냥 ‘두고 보자’라는 입장을 고수한 것은 ‘이러한 논쟁이 과연 얼마나 갈까. 의미 없는 다툼으로만 끝나지 않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열기가 식혀지고, 어느새 이러한 논란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의 시점이 되어 버린 이 때에 다시 한 번 이 이슈를 꺼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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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노’라는 영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무비위크’라는 주간 영화잡지 때문이었다. 어느 감독의 칼럼을 읽다가 헐리우드 영화 ‘주노’가 우리 영화 ‘제니, 주노’의 리메이크라는 언급을 보게 되었고, ‘주노’의 제목과 내용이 어디서 들어 본 것 같다는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뻤었다. 그러나 그 무렵 인터넷에서는 표절에 대한 논란이 달아 오르기 시작했었고, 급기야 이는 표절에 대한 논란을 제기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으로까지 이어졌다.

일단은 ‘주노’의 제작진과 작가 측은 이를 부인하고 있고 영화의 내용도 결과적으로는 많이 달라서 그냥 해프닝이었던 걸로 결론지어진 것 같다. 칼럼을 쓰셨던 분은 ‘제니, 주노’의 판권이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을 ‘주노’로 섣불리 연결하셨던 것일 수도 있다. (‘제니, 주노’의 제작사, 원작자 측에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확실하나 판권이 헐리우드 어딘가로 팔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주노’의 제작진이 아닐지라도... ‘제니, 주노’의 감독은 ‘주노’는 표절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표절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것이 잘못이었냐면 그것은 절대로 아니다. 표절의혹을 제기한 한 블로거는 위키피디아, idmb, ‘주노’의 작가 디아블로 코디의 블로그 등에서 불거졌던 논란을 번역해서 올리고, 특히 작가가 인터뷰 상에서 이 작품의 구상 시기가 매번 달라졌음을 지적하며 의혹을 제기하였는데, 이것은 엄연히 연예신문의 추측성 스캔들하고는 구별 되어져야 한다. 대안언론으로서의 블로깅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는 정확한 근거를 제시했느냐, 아닌가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타당하다.

* ‘주노’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블로그
http://hojustory.tistory.com/152


이와 반대로 두 이야기의 내용이 실질적으로 크게 차이가 있음을 보이며 표절이 아님을 주장한 블로거들의 입장도 올바른 근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옳다. 다만 문제는 반대 측 입장 중에 근거로 제시한 것이 적절하지 않고, 비판이 아닌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적절하지 않은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있다.

1. 컨셉 ”만” 같았을 뿐 이야기가 다르다?

영화에 있어서 ‘이야기의 컨셉’은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영화 제작이 처음 착수되는 단계에서는 한 두 줄로 된 시놉시스만 가지고 이 영화를 찍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10대 소녀가 임신을 하면서 겪게 되는 코믹 상황극’이라는 한 문장만으로도 제작자의 마음이 갈려질 수 있다. 일단 컨셉이 영화화될만한 재미가 있다고 판단이 되면 그 이후에 세부적인 시나리오가 몇 번에 걸쳐서 수정이 되고, 그래서 실제 촬영용 대본은 처음에 완성되어 있던 원고하고는 완전히 다른 경우도 다반사다.

해외 마켓에서도 이미 크게 흥행한 작품이 아닌 이상 간략한 시놉시스와 트레일러 클립(짧은 동영상)만 가지고 세일즈를 하는 경우가 많다. ‘용가리’ 역시 실제 제작이 시작되기 전에 이러한 형태로 사전 판매가 이루어 진 형태였었다. 즉, 해외 마케터는 실제 영화의 내용을 보지 않았지만 그 컨셉에 흥행 요소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구입을 결정한 것이다.

남과 구별되는 컨셉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종종 비슷한 아이디어의 영화가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게 되는 경우를 만들기도 한다. ‘즐거운 인생’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경우가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은 의도적으로 연출되는 경우도 있다. 가령, 픽사와 드림웍스와 같은 라이벌들은 ‘벅스라이프 vs 개미’, ‘니모를 찾아서 vs 샤크’와 같이 의도적으로 컨셉을 입수하고 따라해서 경쟁작과 맞붙이기도 한다. 이것 역시 ‘컨셉’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컨셉 뿐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스토리의 원작이 있는 영화, 리메이크를 한 영화는 정말로 원작의 스토리와 동일한가? 물론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올드보이’ 영화는 ‘올드보이’ 만화와 세부적인 면에서 크게 다르고, ‘아파트’ 영화에서는 같은 시각에 불이 꺼진다는 ‘컨셉’을 제외하고는 ‘아파트’ 만화 원작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10대 소녀의 임신의 코믹극’이 너무 흔한 것이라 컨셉으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에게는 영화 ‘스캔들’은 ‘불륜으로 인한 파국’이라는 우리가 매일 드라마에서 보는 컨셉을 영화화하면서 왜 ‘위험한 관계’라는 외국 작품에 판권료를 지불했나라는 질문을 드리고 싶다. ‘스캔들’은 시대 배경 자체가 너무도 달라서 대놓고 베꼈더라도 티도 안 났을 텐데 말이다. 일본 드라마 ‘마이 보스 마이 히어로’ 역시 세부적인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조폭이 학교에 갔다.’라는 컨셉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영화 ‘두사부 일체’에 정당한 판권료를 지급했다.

그러므로, 세부적인 이야기가 다르다고 할 지라도 어디선가 돌아다니던 ‘제니, 주노’의 시놉시스를 발견한 프로듀서가 어느 신인작가에게 “이것으로 이야기를 써 봐라”라고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랬나 아니었나 하는 사실은 정말로 밝혀 내기 힘든 일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양심에 달려 있을 뿐이다.


2. ‘제니, 주노’와 같은 ‘쓰레기’ 영화로 어떻게 ‘감히’ 비교를 하나? 헐리우드에서 왜 잘 알려지지도 않은 하찮은 영화를 베끼나?

앞의 주장이 오해의 산물이라면 이것은 사대적인 사상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표절’은 베꼈냐, 안 베꼈냐의 판단인 것이지 그 질이 좋냐, 나쁘냐 혹은 누가 만들었냐에 대한 판단이 아니다.

과거 가수 신해철이 ‘모노크롬(1999)’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크리스 샹그리디라는 영국의 유명한 프로듀서와 함께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이 때 발표곡 중에는 ‘Machine Messiah’라는 곡이 있었는데, 2001년에는 이와 거의 흡사한 ‘Metal Messiah’라는 곡이 Judas Priest라는 세계적인 메탈 밴드에 의해 발표된다. (앨범 Demolition에 수록) 사실인즉슨 그 프로듀서가 이 팀을 작업을 맡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쉽게 그 프로듀서가 신해철의 곡을 맘대로 팔아 넘겼을 거라는 의혹을 가질 수가 있다. 외국인들, 혹은 국내의 팬들에게도 주다스 프리스트는 위대한 거장일 수 있고 반대로 신해철은 이름없는 가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네가 뭔데 감히 비교를 하고 표절을 주장하냐.’라고 말 할 자격은 없다. (개인적으로는 신해철이 선도자로서 표절에 대한 재판에 나서 선례를 남겨 주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이는 “영화 ‘주노’가 정말로 표절을 했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제목까지 따라서 짓겠느냐”라는 주장이 의미 없음을 나타낸다. 그들에게는 한국이라는 작은 시장의 작은 영화가 이 만큼 논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생각조차 안 들었을 수 있으니까.


표절은 문화 산업계를 망치는 큰 문젯거리다. 이슈가 될 때만 얘기하다 다시 사라지고 문제가 반복되는 상황을 넘어 지속적인 문제해결의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산업의 핵심 당사자가 아닌 일반 블로거들이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표절 문제’를 계속적으로 공론화 시킴으로써 제작자들이 표절에 대한 유혹에 함부로 빠질 수 없게 주의와 도움을 주는 일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