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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패키지 게임 시대의 종언

[나의 패키지 게임 시대의 종언]

인터넷과 PC방의 급성장 이후 PC 패키지 게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온라인 게임은 더 많은 사람들을 게임의 세계로 끌어 들일 수 있었고 엄청난 성장을 이루기는 했지만, 나는 오히려 이전보다 조금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90년대에는 게임 매니아라고도 해도 될 만큼 PC게임에 빠져 있었고 많은 게임들을 즐겼던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단순히 바빠져서나 게임에 대한 흥미를 잃어서는 아니다. 그것은 게임에 주어진 목적 자체가 그때와는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랄까?

패키지 게임은 기본적으로 혼자서 하는 게임이고, 최고의 목적은 클리어(흔히 ‘깼다’라고 하는 ‘최종 엔딩을 보는 것’)였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게임을 깨고 지우고, 새 게임을 받아 깨고 지우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그 하나하나가 쌓여가는 것은 경험이자 성취감이었다. 특히 RPG(role playing game 역할 놀이)나 어드벤처 게임은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것은 영화를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간접 경험보다 한층 강한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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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온라인 게임에는 이러한 ‘클리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엔딩 없는 세계에서 사람들의 목적은 엔딩이 아닌 레벨업(자신의 능력치를 높이는 것)이나 각각의 승리에만 치우치기 쉽다. 물론 패키지 RPG에서도 레벨업은 중요하고 이는 나 자신의 성장을 정확하게 수치화시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일이기는 하다. ‘우리 실제의 인생에서도 우리의 내적 성장을 수치화시켜 볼 수 있다면 편할 텐데.’라는 상상도 할 만큼. 하지만, 패키지 게임에서도 스토리를 조금 진행시켜나가기 위해 수많은 반복작업으로 레벨을 올려야 하는 부분들은 답답하고 귀찮은 일이었다. 디아블로의 성공 이후 유행이 되어버린 온라인 액션 RPG는 이러한 노가다성 레벨업이 게임의 주목적이 되어 버렸으니 내가 여기에 흥미를 느끼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나 같은 느끼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rpg들이 인기를 끌 수 있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레벨업이다. 단 차이는 레벨업이 나의 성장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대조용의 성격이 크다는 것이다. 패키지 게임에서의 레벨업은 스토리를 진행시켜가는 과정에서 내가 성장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었기에 레벨이 하나 오르는 것도 소중한 일이지만, 온라인 rpg의 레벨업은 조금 과장하면, 내가 레벨 50이라고 한들, 주위 사람들이 레벨 60이라면 그다지 가치가 없고 거꾸로 내가 10이라 해도 주변사람들이 2라면 기쁜 일이 된다. 캐릭터의 부모인 플레이어들이, 자녀가 몇 문제를 맞추었냐는 보지 않고 몇 등 인가만을 바라보는 그릇된 교육열의 부모가 되는 것 같다고나 할까. 사람들은 지지 않기 위해서든, 남들보다 앞서는 것이 즐거워서든 오늘도 열심히 게임을 한다. 행복하기 위해서인지, 살기 위해서인지 모를 인생처럼...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라는 명제를 설명하는 근거로 드는 것 중 하나가 방글라데시가 선진국들을 제치고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 순위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통계 자료는 그 근거의 허망함을 다시 보여준다. 방글라데시 국민들은 ‘자기가 주변 사람보다 부자라고 생각하는가?’라는 통계에서 역시 수위를 차지했었다는 것이다.

나 혼자만 잘하면 완성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패키지 시대는 다시 말하면 환상 속의 세계였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온라인 게임을 보는 것이 불편했던 것은 즐거운 현실도피일 수도 있는 게임에서조차 현실을 봐야 한다는 것 때문인지도… 그러나 현실은 아무리 불편한 것일지라도 환상보다 가치 있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온라인 게임이 현실과 닮아가는 것은 불편하다고 피할 일은 아닐 것이다. 유명 RPG게임 리니지에서는 게임 내에서의 그룹 멤버들이 만날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게임에서의 만남이 현실의 인맥으로까지 확장이 되는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게임의 미래라고 일컬어지는 ‘세컨드 라이프’(온라인 상에 펼쳐져 있는 제2의 세계, 동명 타이틀의 온라인 게임도 있음)의 경향이 이미 이루어져가고 있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친구로 볼 것인가, 적으로 볼 것인가는 분명 개개인의 몫에 달려 있겠지만, 온라인 게임은 분명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인생의 가치와 목적으로는 ‘무엇을 하는 것’, 다시 말해 목표의 성취에 중점을 두고 있는 때가 많았다. 그러나, 세상과 인생은 나 하나 노력해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잘 될 때에도 사람이 있었고, 안 될 때에도 사람이 있었다. 결국 살아가는 데에는 누구를 만나고 어떤 관계를 맺는가가 더 중요한 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가치의 변화가 이루어지던 날, 나의 패키지 게임 시대는 진정으로 끝이 났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